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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십자가 - 이근호 목사

고물목사 2010. 5. 12. 23:05

권력과 십자가

2010-05-12 10:37:14   이름 : 이근호   
 
 
권력이란 ‘집중화 작업’을 말합니다. 힘이 자기 몸으로 모이지 아니하면 자신이 누군가를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자기 곁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힘’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악마가 사람과 더불어 사는 삶의 방식입니다. 힘을 쌓고 축적하는 식으로 자아를 규정하게 해서 ‘권력의 주체’로서는 자아를 규정하게 하는 겁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 16:21-23)

힘의 집결 뭉치가 곧 자아로 규정합니다. 가정이 그러하고 교회가 그러하고 기업이 그러하고 동창회가 그러하고 친목모임, 계모임이 그러하고, 동우회가 그러하고 국가가 그러합니다. 모두 힘의 집결체입니다. 그런데 그 힘은 인간이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외부에서 쳐들어 온 것입니다. 신기한 사실은, 힘이 집중되는 것이 본인이 억지로 끌어 모으는 식이 아니라 외부에서 밀어 넣은 식이라는 겁니다. 곧 악마는 구조적으로 세상을 덮쳤습니다. 바다에서 올라와서 덮쳤습니다. 따라서 사방에서 좁혀 들어가는 군데군데에서 1000개의 고원처럼 힘의 집결체가 발생되는 겁니다. 사람이란 그냥 힘에 밀리는 대로 살게 되면 어느새 힘이 포위망 속에서 자아라는 새로운 힘의 집결체가 생성됩니다.

즉 외부에서 덮쳐오는 힘에 눌려서 피신한다든지 저항한다든지 자신을 지탱하려고 애쓰다보면 비로소 자아의 윤곽이 잡히게 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본인의 본질입니다. 밀리고 밀리고, 쫓기고 쫓겨다보면 그 운곽선이 갖추어지고 그 안에서 ‘자아’라는 꽃봉오리가 피는데 그 주변에서 그동안 나를 몰아세운 그 세력들이 곧 타인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감시하면서 대결구조로 버티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식의 성장과정을 내내 지켜보는 부모의 따가운 시선 같은 것, 신입사원의 기안 작성 및 업무처리를 감시하는 상사 같은 것)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세상 사방에 천사들을 흩어 보내어서 사태를 이런 식으로 힘과 힘의 물방울들로 맺혀지는 환경을 조성하신 것입니다.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이르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 검은 말은 북쪽 땅으로 나가고 흰 말은 그 뒤를 따르고 어룽진 말은 남쪽 땅으로 나가고 건장한 말은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고자 하니 그가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라 하매 곧 땅에 두루 다니더라”(숙 6:4-7)

결국 인간이란 힘으로 조성된 구조에서 평생토록 못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죽게 되면 죽음 후의 구조가 이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자아라는 것은 끝까지 힘의 구조의 결과물입니다. 애초에 마음 독하게 먹고 자아를 규명하겠다고 해서 자아가 제대로 제 모습이 잡히는 것이 아닙니다. 궁지에 몰리게 되면 노출되는 것이 자아이며 그 자아상은 본인도 미처 예전에 짐작 못했던 바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악마의 힘이 조립 시켜주는 대로 그대로 드러날 뿐이라는 말입니다.

마치 조각가가 도려내고 잘라내고 다듬는 작업과 수고의 결실로서 하나의 작품으로 영그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궁지의 몰림 현상은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악마의 하수인임을 노출시키게 됩니다. 악마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면서 살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하라는 명령에 순복하면서 모든 분야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곧 “신을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신이 될 수 없다”의 원칙대로 움직이면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신과 맞서서 신을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성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신을 없애고 신이 없는 세계, 곧 우리들만으로 천국이 되는 세계를 향하여 진격하겠다는 것이 구약 이스라엘 민족 내부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의 모든 처소에서 신을 박멸하는 운동에 나서게 됩니다. 마치 파리, 모기 나 쥐나 이를 잡듯이 말입니다. 신의 흔적을 지워나가고 그 자리에 “하면 된다”로 채워나가는 겁니다. 신을 인정하는 자를 죽이고, 신을 죽이고 자율적으로 사는 사람을 우대하는 정책으로 드러나는 것이 인간 세계입니다.

‘자연스럽다는 것’이 이런 현상들을 두고 말합니다. 자연스럽게 살면 자연스럽게 악마의 얼굴로 사는 바가 됩니다. 마태복음 25:41-43에 보면,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자연스러움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노선을 비켜가서 다른 노선을 달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는 노선에 올라타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노선은 생각지도 않을뿐더러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노선이라는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부자연스러운 선택이 됩니다. 마치 절벽으로 통하는 길을 질주하는 것과 같은 무모한 주행이 됩니다. 이처럼 힘, 곧 권력이란 그 앞에 붙는 형용사가 있습니다. “살고자 해서 찾는 권력”이 됩니다.

악마는 ‘죽기를 무서워하는 인간’들을 잘도 갖고 놉니다. 그들 인간들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결국에는 자신이 죽는 쪽이 아니라 사는 쪽으로 몰리게 되어 있음을 장담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불쑥 진짜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죽음의 힘을 몰고 옵니다. 망해야 산다는 겁니다. 그는 인간이 가지 못한 위치에서 나타났습니다.

마치 가인에게 있어 아벨은 자신과 소통이 되는 노선이 아님을 압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말씀은 곧 인간들이 평소에 하고 있는 행세들입니다. 즉 “나 자신 외에 다른 존재를 내 앞에 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내 노선 위에 다른 인간이 침범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신이 된다는 것은 오로지 자신만 영원히 사는 경우를 말합니다.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남은 다 죽고 자신만이 최종 결승에서 승자로 남는 것을 말합니다. 그럴 때 진정 신이 신답게 된다고 보는 겁니다. 이처럼 ‘산다’는 의미는 생존의 의미가 아니라 ‘신이 되겠다’는 의지가 내용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죽는 다는 것은 ‘신이 아니었음’을 드러내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신으로부터 심판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신세, 이것이 바로 ‘신이 아님’의 특징입니다. 결국 인간은 이로서 신을 늘 죽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신이 말을 걸어와도 우리는 신과 대화하기 보다는 내가 죽어야 하고 내가 추방해야 하고 내 노선에 나타나 귀찮게 하는 장애요인을 제거하는 것에 먼저 말을 겁니다.

“맞을래? 죽을래? 안 비킬 거야?” 이것이 인간들이 신 흉내를 내는 전형적인 삶의 형식인데 여기에 예수님께서는 가담하십니다. “죽여라. 내는 너의 신 됨을 훼방 할테니 그 때마다 너는 나를 죽여라. 그래야 너는 진정 악마의 본색을 드러낼 수 있다”가 됩니다. 자아, 곧 주체란 자신이 신이 되는데 필요한 힘이 없으면 구색을 갖출 수가 없습니다. 자아로 산다는 것은 평소에 늘 라이벌 되는 신을 죽이면서 사는 겁니다.

신을 섬기는 척 하면서 실은 신을 자기 손으로 다루다가 그 신을 죽여서 타넘는 방식으로 자기 영토를 확장하는 식으로 인간은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매사가 그러하고 모든 분야에서 그러합니다. 성도는 비난받아야 하고 얻어맞아야 하고 죽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 모두가 자칭 신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들추어내는 미끼로서만 존재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희생이라고도 하고 섬김이라고도 합니다. 성도의 내부는 희생으로 치닫는 모든 설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기계들이 작동해서 아벨처럼, 세례요한처럼 세상의 힘에 치이듯이 그의 목숨은 소모됩니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계 2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