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알기방

2012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3강

고물목사 2012. 8. 9. 07:58

2012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3강


(강의: 이 근호 목사)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첫째 시간, 둘째 시간 동안에 믿음이 없어도 구원받을 수 있는 그러한 아이디어가 있을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냥 알기만 하면 사도 바울이 증거하는 그 믿음을 대신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입니다. “당신 믿음 있습니까? 없어요? 그래도 교육만 잘 받으면 당신 속에 있는 이성이 믿음을 대체할 수 있게 하고 그 믿음이 사도 바울이 말하는 모든 복음을 당신 것으로 만들어주어서 구원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라는 거죠. 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을 로고스적으로 조립해서 신조, 신앙고백, 그런 것들을 교회에서 제조해서 일반인들로 하여금 이해만 시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장사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는 영업전략으로 그동안 교회사는 이어져 오고 있었습니다.


로마 콘스탄틴 대제 시대에 313년 밀라노칙령에 의해서 전체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국교’라는 이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인간의 ‘국교 전략’에 동조하시겠습니까?


여기 이태리가 있으면 여기 밀라노가 있습니다. 여기에 콘스탄틴 대제가 칙령을 발표하고 그 이후 데오도시우스 황제 이후에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국교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공무원의 승진을 비롯해서 모든 영역에서 기독교교인이 되면 인센티브를 얻게 되는 겁니다. 반면에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은 생활면에서 상당한 압박을 받게 됩니다. 또한 황제가 신학자들을 모아놓고 “어떤 것을 알고 익히면 신자라고 할 수 있느냐”를 묻고 법률적인 기준책 마련을 종용하게 됩니다. 교리를 암축해놓은 신조를 만들고 그것을 수용하는 백성들에게는 로마 제국 내에서 기독교신자로서 행세할 수 있게 만들겠다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천국을 미끼로 해서 사람들을 교회라는 권력체 속에 모집하기 위한 정책입니다. 그렇게 해서 드넓은 로마제국이 일치된 사상 속에서 결집할 수가 있는 겁니다. 이런 황제의 의중과 그 안에서 정치적인 권력을 추구하는 교회의 의중이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교회는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만들었는지 다시 요약하면, 뮈토스에서 로고스로 바뀌면서 만들었다 했습니다. 뮈토스, 곧 신화란 상당히 변덕스러운 자연에 대해서 같이 변덕스러워하면서 자연에 순응하는 식으로 자연을 이해하고 적응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자연은 크고 위대하고 인간은 작으니까 고개 숙이고 들어가는 것도 하나의 생존의 방법이 되는 겁니다. 어부들이 바다에 갈 때는 포세이돈 신에게 제사함으로서 그만큼 되고, 또 마야문명에서 가뭄이 든다하면 신에게 사람을 공양하는 겁니다. 신을 달래는 방식이 신으로부터 사죄받는 방식이 되는 겁니다.


신화적인 방식에는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공동체의 생존문제입니다. 어린애 하나 죽어서 우리 공동체가 자연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감행할 수 있는 일입니다. 희생제물을 바치는 고대종교의 행태가 다 이런 신화적 발상에서 나온 겁니다.


이 신화에서 로고스로 바뀌었다 했죠. 원래 뜻은 모아서 정리 정돈한다입니다. 크게 봐서 질서가 되는데 이 질서를 잡는 아이디어가 인간 내부에서 나오니까 인간 내부에도 로고스가 작용한다고 보는 겁니다. 그리고 그 로고스에 입각해서 타인들과 공통적인 관심사를 나눌 수 있는 겁니다. 여기에 쓰여지는 것이 곧 언어, 로고스의 집약형태인 ‘말’이 되는 겁니다.


뮈토스에서 로고스로 되면서 로고스는 자연세계를 손질합니다. 무질서한 자연을 이제는 질서 있게 우리가 잡아내겠다. 그걸 재단(裁斷)이라 합니다. 무질서한 신화의 세계를 로고스, 이성의 세계로 정리해버리는 겁니다. 혼돈스러운 자연을 관리하면 여기서 살기에 편리한 게 나올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게 유용성이라는 거예요. 유용성을 선이라. 우리말로 착함이죠.


이 착함을 나의 착함, 개인적인 착함이 아니라 전체적인 착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필요한 조직, 시스템이 있는데 그게 바로 플라톤에 의하면 국가라는 겁니다. 국가라는 시스템을 통해서 공동의, 최고의 선을 찾아내는 거죠. 여기서 철학자 플라톤의 말을 먼저 들어봅시다. 제가 플라톤을 대신하겠습니다. “사람들 속에 혼자 살지 못하고 더불어 사는 것, 이것은 인간 속에 로고스가 있기 때문이다. 질서 감각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질서 감각이 극대화된 것이 국가기 때문에 인간은 싫든, 좋든 국가를 찾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왕 찾는 국가 제대로 한 번 만들어보자.”입니다.


여러분 장롱에 서랍들 있잖아요. 서랍에 들어가지 않는 속옷들이 방에 있으면, “애가 밖에 나가면서 어지럽혔구나. 청도도 안 하고.” 하고 엄마가 와서 속옷을 서랍에 넣어주죠. 서랍 바깥에 있는 옷은 더럽힌 것이고, 악이죠. 서랍 안에 집어넣으면 이건 선이 되는 거죠. 이건 우리 속에 플라톤에 의하면 로고스가 있는 거예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했죠. 그 로고스가 그 로고스다 이 말이죠. 신학자들에 의할 것 같으면 말입니다. 철학자에 의해서 조성된 단어가 신학자들에게 의해서 그 철학적 아이디어를 교회에 집어넣은 재료가 되는 겁니다. 철학자들 보기에, 혹은 신학자들 보기에 성경이야기는 전부다 자기들 철학 속에 다 포함돼있는 거예요. 성경은 작고 철학은 크다 이 말이죠. 성경은 좁고 철학은 넓은 거예요. 성경에서 무슨 논의를 해도 그건 철학에서 커버가 된다 이 말이에요. 성경은 믿으라 하지만 넓은 철학은 알면 되는 거예요. 지가 알아서 구원받는다 이 말이에요.


지가 알아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구태여 성령이 필요 없고 반복된 교육하면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나중에 갈수록 더 알고 넓혀 가면 나중에는 얼추 신학박사 정도로 많이 아는 거예요. 목사가 이상한 소리하면 저건 아닌 것 같은데. 하고 감 잡습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서랍 바깥에 있는 것은 악이 되는 겁니다. 로고스를 벗어나면 악이 되는 겁니다. 뮈토스, 신화의 세계에서는 바깥에 나와 있는 것도 선이고, 안에 있는 것도 선인데 로고스 시대에는 그렇지 않아요. 서랍에 집어넣으면, 예를 들면, 속옷은 두 번째 서랍에 양말과 같이 넣게 되면 정돈이 되고 질서가 잡힙니다. 인간은 어디서 안심을 느끼느냐 하면, 내가 이 나라에서 어느 소속에 있으며 나는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가를 잡기 위해 내 자리를 찾아갈 때 비로소 나는 사는 재미를 느끼고 안심을 느낍니다. 물론 그 다음부터 아랫배가 나오기 시작하겠지요.


여기서 같은 나라에 국민이라는 소속감을 느끼고, 올림픽에서 양궁 경기 보면서 눈물 흘리면서 “잘한다 기보배!” 하고, 박주영 한 골 넣으면, “와!” 하고 소리치는 겁니다. 바로 이런 점을 두고 플라톤은 말하기를 , 그것이 원래 인간의 모습이다는 겁니다. 인간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안에는 로고스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 로고스는 국가로서 최종적인 모습을 갖춘다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지중해에 빠졌던 소말리아 난민들이 자신이 태어난 소말리아를 버리고 프랑스, 이태리를 찾는 이유는 새로운 소속감을 얻기 위함입니다. 터키 사람들이 독일을 찾아 이민 오는 것도 새로운 최고선 체제에 소속되기 위함입니다. 유렵에서 집시 이외는 모두 소속감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 소속감이 극대화된 형태가 바로 이차대전 때 이태리의 파사즘이나 독일의 나치 같은 겁니다. 이런 사상은 극우파의 양태를 지니는 겁니다. 기독교를 앞장 세워 로마제국의 소속감을 집어넣는데 기독교 삼위일체라든지 기독교교리가 로마제국을 하나의 ‘국가 로고스’ 노릇을 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예수님과 신까지 동원해서 로마제국을 하나로 만드는데 사용했는데 교회는 이 정책을 ‘면제 방식’으로 활용하여 대중들을 집단적으로 교인만든 겁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는 개인구원을 용도가 아니고 국가를 위한 교리입니다. 어제 교재 3페이지를 봤지만 아타나시우스신조라는 게 나오죠. 아타나시우스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 325년 니케아회의 때 주도적인 발언을 한 알렉산드리아파 사람입니다. 이집트 신학자이지요. 현재 터키 이쪽에 니케아라고 있어요. 325년 니케아회의에서 콘스탄틴 대제가 고집해서 “나라를 위해서 너희들이 할 수 있는 게 뭐냐? 전부다 가지 말고 여기서 결정해. 우리나라는 기독교가 국교인데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여기서 이런 걸 믿으면 기독교신자요, 이런 걸 거부하면 기독교신자 아니라는 것을 정해. 다 집에 못 가. 출장 왔어. 여기서 다 정해. 다수결로 하든지, 만장일치로 하든지 다 정해. 만약에 정해진 것을 위반하면 이단으로 내가 알아서 경찰력 동원해서 처리할 테니까 날 믿고 다 하란 말이야”라고 명령해서 니케아회의에서 삼위일체교리가 정립됩니다.


이때 기독교교파가 셋이었음이 노골화됩니다. 그 하나가 로마파인데 이 로마파는 법으로 구원받을 사람을 결정하자는 겁니다. 구원받을 사람을 결정하려면 제정자가 있어야 되는데 그 제정자로 로마교회가 나서줄게 한 거예요. 네가 무슨 자격으로 개인적인 신앙을 관리하려고 하느냐 시비 걸면 자기네들 쪽에는 베드로 무덤도 있고, 사도 바울의 무덤도 있기 때문에 우두머리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교회가 아무리 많더라도 영(0)순위가 로마교회라고 주장한 겁니다.


무덤 있는 것이 어떻게 교회 머리로서 자청하는 이유가 뭡니까? 무덤이 뭔데요? 무덤이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성지순례 가듯이 원조, 근원을 찾고 싶은 인간의 심리입니다. 한류를 찾아서 한국으로 오잖아요. 기독교복음을 누가 정립하고 누가 전했느냐가 그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했던 모양이에요. 하여튼 그들에게는 예수 믿는 건 없습니다. 같은 사람을 믿고 싶은 겁니다. 어떻게 기독교신자가 되느냐가 중요하지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런 것은 없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그전에 로고스 신앙이 있었기 그래요. 로고스 신앙, 이성 신앙, 합리적 신앙이죠. 로고스 신앙은 모든 종교를 재조립하기 때문에 기독교도 마찬가지고 복음도 마찬가지고 로마에서는 법으로 하는 겁니다.


로마파는 원죄개념이 있어요. 그러면 다른 파는 원죄개념이 없습니까? 다른 파는 원죄개념이 없어요. 신기하죠. 정통동방정교회는 원죄 개념이 없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렇게 욕했던 동방파교회, 그림 그려놓고 거기다 뽀뽀하고 아이콘을 섬기는 그 동방파. 촛불 켜놓고 구약으로 돌아가서 신부가 치렁치렁 사제옷 입고 축성하고 물이나 뿌려주고, 성직자가 수염을 기르고, 수염 기르지 않는 성직자를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그 러시아정교회는 원죄 개념이 없습니다. 현재 러시아 정교회가 가장 교세가 큽니다. 이러한 종교적 파당문제는 실은 민족 정체감을 위한 구실로 이용됩니다. 유고슬라비아라는 나라는 연방으로 된 나라입니다. 연방이 해체되면서 7개의 국경, 6개의 공화국, 5개의 민족, 4개의 언어, 3개의 종교, 2개의 문자를 쓰는 복잡한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중에 분쟁의 요인이 되는 나라는 서쪽에 있는 세르비아라는 나라입니다. 그 위에 접경한 나라는 크로아티아라는 나라인데 이 나라는 가톨릭입니다. 세르비아는 정교회이고, 그 옆에 세르비가 시비걸어서 내전을 일으킨 나라인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는 이슬람교나라입니다.


그래서 세르비아 밀로세비치가 화가 나서 자기 고향 찾겠다고 보스니아를 1998년에 공격해서 이백만 명을 청소했어요. 이단이 어디 고향에 살아? 여기에 대해 너무 심했다고 여긴 크로아티아가 개입했다가 정작 도움받고자 하는 보스니아가 종교적 고집을 부리자 이제는 내전이 3파전이 되고 만 겁니다. 이것이 유고슬라비아 내전입니다. 코스보라는 세르비가 남쪽 자치구 동네가 세르비아의 공격을 받고 완전히 작살납니다.


그게 교리문제를 앞장 세워 민족 문제를 해결하려는 겁니다. ‘국가교회’가 되어야 성이 풀리는 겁니다. 왜냐하면 민족 정체성이 종교 정체성으로 정립되고 이는 인간 속의 로고스 의식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교회가 있다는 것은 그 교회를 전부 수용하는 국가가 있다는 말이고, 국가가 있다는 것은 한 종족 전부가 국가 한 덩어리 될 때 이것이 가장 로고스다운 거예요. 로고스로서 하나되는 일체감 말입니다.


유아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는 내 집안 사람이다”는 가문 정체성을 종교적인 형식으로 실시하면서 동시에 신으로부터 사죄 받을 수 있는 종교적 욕망도 함께 달성할 수 있다는 보는 겁니다. “목사 딸이 그 짓하면 돼?”라는 식으로 집안에서부터 계속 세뇌 주고 교육시키는 겁니다. 종교가 하나 돼야 집안이 편안하다는 겁니다. 종교가 다르면 집안 꼴이 안 된다는 겁니다. 신앙이 같을 때까지 민족 정체성은 멈추지 않는 겁니다. 국가 전체가 종교법으로 묶여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 법을 정하는 어떤 원칙에 따라 신학도 3세로 나눠요. 로마파, 알렉산드리아파, 동방파가 그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에 있어요. 이집트에 아주 번창했던 도시에요. 나중에는 콘스탄티노플이 생기고, 서열로 따지면 로마파 1등, 콘스탄티노플이 2등, 알렉산드리아 3등, 안디옥 4등, 예루살렘은 망해버리니 5등입니다. 이런 식으로 서열 정하면서 황제는 반드시 로마출신이어야 한다는 그런 시대가 된 거예요. 그게 바로 오늘날 천주교가 된 겁니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 캘빈과 루터를 따르는 개혁주의는 이 잘못을 너무너무 알기에 두 번 다시 이런 잘못을 안 저지를 겁니다.”라고 주장하고 싶은 구호도 있을 겁니다. 오직 믿음 중심이니까 이런 과오가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의 패러다임에 불과합니다. 나름대로 역사와 전통 굳히기 들어가는 이유는, 사람이란 이런 로고스적 질서를 사면 형식으로 삼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정통개혁주의가 신형 천주교라고 하면 됩니다. 교회는 신종 성당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사람을 교회에 데려오는데 그 사람을 설득시키고 납득시키려면 네가 아는 단어와 내가 아는 단어를 연결시키면 딜 것입니다. 이야기하면서 결속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언어로 상대방의 공통점을 끄집어내어서 바로 그 단어를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그 단어로 교체하면 그것으로 우리는 한 형제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교회에서 내세우는 아이디어입니다. 문제는 단어 선정을 어떻게 해서 조립하느냐에 달렸겠지요. 여기에 따라 교단과 교파가 갈라지는 겁니다. .


초대 교회에는 ‘삼위일체’에서 ‘일체’에 해당되는 단어가 ‘우시아’라는 단어이며 삼위에 해당되는 ‘위’‘라는 단어는 ‘휘포스타시스’입니다. 우시아는 본질에 해당됩니다. 호모우시아하면 동일본질이고, 호모이우시아하면 유사본질이 됩니다. 325년에 니케아에서 회의할 때 단어 싸움이 벌어진 겁니다. 아리우스라는 알렉산드라아 출신 사람이 있어요. 이 아리우스가 뭐라고 자기 주장을 그 회의에서 펼칩니다. 이것은 교회사 책에는 잘 안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고 야사는 아니고요. 흔히 정통 교회에서는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아리우스는 이단이라고 비난받는 사람입니다.


아리우스가 진짜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본질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호모이우시아, 즉 유사본질이라고 해야 한다는 겁니다. 안디옥 동방교회파에서 그런 주장을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로마파에서 이참에서 로마 제국 전역에서 동방파의 기세를 정리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교회의 중심부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로마 황제를 덧입고 대결을 통해서 세력 정리에 나섭니다.


아리우스가 했던 본심에 대해서 나온 글이 거의 없어요. 겨우 찾았어요. 맨 날 피고의 입은 무시당하기 일수이니까요. “ ‘예수님이 하나님과 똑같다. 예수도 하나님이고, 성부도 하나님이다’고 하는데 그건 잘못이다. 왜냐?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과 성부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개념을 인간이 정할 수 없다는 거예요. 같은 신이지만 신이라는 의미가 차원이 다르다는 거예요. 다른데 너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으로 만들기 위해서 예수님이 갖고 있는 신이라는 개념을 왜 아버지께 그대로 적용하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는 신이라 하지 않고 뭐라 하느냐고 반박이 들어오니 “그냥 입을 다물자.”라는 겁니다. 그것은 예수님한테 신이라고 말을 붙일 수도, 하나님 앞에 신이라고 말을 붙일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은 언어 이상의 초월하는 존재기 때문에 삼위일체를 초월하는 신의 개념을 예수님한테 적용시켜버리면 그때부터는 격이 다른 단어를 한데 섞어버리면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 아리우스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아타나시우스는 주장하기를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다는 거예요. 로고스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신에서 나왔습니다. 일자에서 나왔어요. 로고스가 하는 역할은 신과 피조세계를 중재하는 역할입니다. 누메네우스(2세기 후반 사람)가 삼신을 주장했어요. 창조자도 신이고, 중재자도 신이고, 만들어진 피조세계도 신이 된다는 거예요. 피조세계가 신이 된다는 말은 그 피조세계 안에 신의 영향력과 신의 흔적이 남아있다는데 성립이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삼신이 있다고 누메네우스가 이야기했고, 그 전에 에우도로스(1 세기 사람)은 그 3신을 하나(1)라 해서 삼중신을 언급했어요. 삼위일체 성립하기 이전에 철학자들이 이런 아이디어를 먼저 내놓은 겁니다. 그 다음에 알비니우스라는 사람이 그걸 발전시켜서 정립을 했는데 제일 신이 있고(일자(一者), 그 다음에 두 번째 신이 이성(Nus), 세 번째 신이 영혼이라고 했습니다. 일신한테 사명을 받아서 활동하는 것은 누스, 이것은 이성인데 2세기경에 플로티누스라는 철학자 이론을 빌려서 했는데 그 다음에 이성이 전달되면 영혼이 되는 거예요. 나머지는 질료, 재료가 되겠죠.


누스, 이성, 일자, 일자는 하나밖에 없는 존재, 이것이 일체가 되는 겁니다. 왜 일체가 되느냐 하면, 옛날부터 사람들이 이성으로 재단을 할 때 제일 고민이 뭐냐 하면, 신은 하나인데 왜 사람 숫자가 많으냐는 겁니다. 공장에서 코카콜라를 제조하면 특징이 뭐냐 하면, 코카콜라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코카콜라는 한 개만 잡아도 똑같지요. 같은 제품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그런데 신은 사람을 만들 때 얼굴이 똑같지 않느냐 하는 문제에요. 이것이 철학자들의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쉬운 것이 여러 신이 여러 명을 제각기 만든다면 제일 쉬워요. 고대 신화에서는 그래요. 그런데 이성적으로 들어가서는 원래 만드는 신은 둘이 아니고 하나여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여야 된다는 것은 좋은데 어떻게 하나가 둘, 셋, 넷이 되느냐는 그 문제에 빠질 때 해결책이 없습니다.


탈레스란 사람은 물이다. 아낙시만드로스란 사람은 무한정자라 해서 최초로 추상적인 개념을 집어넣었어요.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라 했고요, 엠페도클레스는 그것을 당기는 것은 사랑과 미움으로 당긴다는 아이디어를 내놓습니다. 특히 아낙사고라스라는 사람은 정신이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고, 파르메니데스는 모든 변화는 결국은 존재하는 것이 변하기 때문에 변화에 신경 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떤 변화이든 일단 멈추면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재밖에 없다고 이야기했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하는 자체가 진리기 때문에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자체로서 성립한다고 본 겁니다. 그러니까 변화한다는 자체가 신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들이 무슨 뜻에서 이야기하느냐 하면, 왜 신은 하나인데 다양하냐 이 말이에요. 그것 때문에 해결이 안 돼요.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골치 아픈 신을 안 믿으면 되는데 할 때 그것도 문제가 있어요. 신은 안 믿으면 되는데 어디서 생기느냐가 문제가 되는 거예요. 도대체가 있는 것은 왜 있느냐?는 겁니다. 이미 있는 존재자 중에하 하나를 뽑아서 “네가 이 세상을 다 만들었지?”라고 물어보세요. 분명 아니라고 할 겁니다. 예를 들면, 토끼에게 “토끼야 네가 전 세계를 다 만들었지?” “아니요. 나는 안 만들었는데요.” 그러면 거북이한테, “거북아 네가 만들었느냐?” 즉 현재 만들어진 것한테 네가 전부를 만들었느냐고 물어보니까 전부다 아니래요.


그러면 분명히 생기기는 생겼고, 만들었다고 나선 사람은 하나도 없고, 그걸 모르니까 로고스가 속이 타고 괴롭지요. 내가 누구이미 어떤 존재자며, 어디서 만들었는지 모르면 맛있는 걸 먹어도 밥맛이 안 나고 인생의 의미를 결정적으로 제시할 수가 없잖아요. 요즈음은 돈만 있으면 그 딴 것 신경 쓰지도 않지만 말입니다. “신 없어도 밥만 잘 먹더라”


옛날에는 인생의 의미를 신에게 찾는데 그런 사람에게 해결책이 없으니까 이것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고민거리에요. 그래서 천재가 나타나서 속 시원하게 해달라고 했는데 그래서 몇몇 천재들이 등장했습니다.


그중에 플라톤이라는 천재가 등장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 그거 가짜입니다. 왜 가짜냐? 그것은 재료에다가 형상을 가미한 거예요. ‘형상’이란 말 나왔지요. 중요한 용어입니다. 왜 중요하냐 하면, 창세기 1장 28절에 나오거든요. 창세기 1장 28절을 해석하면서 플라톤 철학을 여기다 도입한 거예요. 왜요? 내 안의 로고스(이성)이 납득이 돼야 되니까요. 사람이 납득을 하고 문장을 이해할 때 기독교신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건 옛날부터 그랬어요.


형상+질료, 질료라는 것은 흙 이런 것, 물질이죠. 물질이 바로 실체가 되고, 실체는 물질이 부서지면 실체도 날아가고 형상은 형상끼리 따로 모이는 거예요. 인간 속의 형상은 뭐가 되겠습니까? 영혼이 되고 물질은 흙이 될 수밖에 없는, 60조 개의 세포, 이것이 질료가 되죠. 그래서 인간은 영혼과 질료로 되어서 육은 죽지만 영혼은 떠나서 하나님께로 간다는 전도서, 또는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을 표현하는데 ‘영혼이 떠나시다’는 그 표현들이, 바로 사람들이 이런 성경적 표현을 자신의 로고스로서 일체감을 갖고자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납득해서 신자가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용어들이 언어입니다. 언어라는 것은 마치 난타공연과 같아요. 난타공연에서 북에다 물을 뿌려놓고 주방장 복장을 한 연극배우들이 쳤습니다. 치면 물방울이 뛰죠. 물방울 뛰는 게 언어고, 언어를 뛰게 만드는 내부에 로고스의 덩어리가 있어요. 그래서 인간의 모든 언어가 이 언어를 사용해도 이쪽 언어와 서로 소통이 되는 것은 이렇게 바로 소통이 되질 않고 이렇게 내려와서 소통이 되는 겁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했죠. 할머니가 손자 보면서 자기 며느리 오니까 하는 말이, “바깥에 덥지?”라는 말이 무슨 뜻이겠어요? “나, 힘들었어. 더 이상 못 보겠다.”는 겁니다. 그것도 이해 못하는 며느리가, “어머니. 지금 어제보다 0.5도 내려왔습니다. 오늘 36도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지금 시어머니의 언어 사용 의미를 이해 못하는 거예요. 즉 “더워서 애 못 보겠다. 돈 들여서 바꾸든지 해라. 나이도 많고 이제 내 인생 즐기겠다.” 그런 뜻인지 그 말을 이해 못하는 거예요.


언어는 언어로 바로 통하는 것이 아니고 뭔가 내면을 통해서 가는 거예요. 뭔가 내뱉을 때는 어제 이야기했잖아요. 모든 언어는 “헬프 미, 나 좀 살려줘”에서 울어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모든 언어가 인간의 로고스에서 나온다 말이죠. 그러니까 플라톤은, “여러분들, 몸은 안 중요해요. 신에게 복귀하는 형상이 중요합니다.”라고 외치는 겁니다. 플로티누스(2세기 사람)는 신이 이 땅에 머물다가, 드러내다가, 복귀한다고 했습니다. 들어보면 마치 로마서 11:36에 나오는 “주께서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로 돌아간다”는 그것과 비슷한 거예요.


로마제국은 모든 성경말씀을 철학으로 다 바꾸어서 믿음 없어도, 즉 성령 받지 않더라도 구원되게끔 조치를 취하는 겁니다. 성령이란 스토아철학(기원전 3세기 경)에 의하면 프뉴마에요. 성령도 철학이라니까요. 철학의 한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어요. 그러니 로마제국의 신자들은 집단적으로 세례 받아도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거예요. 왜요? 빨리 세례 받아서 공무원 승진해야 되니까. 모든 사업이 인센티브가 있으니까. 로마제국에서. 자기도 기독교신자라는 거예요. 아타나시우스신조 이해하고, 아리우스가 왜 나쁜지 이해하고 그게 왜 이단 돼야 되는지 동의한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신이지 어떻게 예수님은 낮은 신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도 동의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헬프 미” 즉 “나의 생존과 구원에 협조해 달라는 겁니다.


신학자들은 이걸 미끼로 자기 교세 키워서 이익보고 영지를 넓혀서 정권과 잡고 정치에 관여하는 겁니다. 권력에 염증을 느낀 사람은 수도사로 나섭니다. 11세기부터 본격화 됩니다. 수도원 건립은 356년 안토니우스의 생애가 알려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군대식 수도원 운용은 포코미우스가 시작했습니다. 군대식 규율과 힘든 노동을 기본으로 합니다. 6세기 경에는 베네딕도 규칙서가 만들어집니다. 수도 생활이란 포기 생활을 의미합니다. 고독이 취미가 되는 것이지요.


이는 자처해서 사회적 죽음을 갖는 겁니다. 새로운 아담이 되기 위한 대안, 일종의 독고노인되기 취미입니다. 주로 사막으로 나아갓는데 수 천명이 나갔습니다. 사막에서 마귀하고 한 판 싸움을 벌리기 위함입니다. 거룩한 남자되기, 이는 곧 ‘신의 친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얻은 사람은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겁니다. 이것을 항시적인 은사로 소유하려고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영적 엘리트’가 되고 싶은 겁니다.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영발 소지자가 되고 싶은 겁니다.


로고스에서 뮈토스로 돌아갈 사람들은 마귀와 한 번 싸워보겠다는 거예요. 성경에 있으니까 자기도 그렇게 해보겠다는 겁니다. 이게 나중에 영발이 되고 되고 권력으로 우대받는 신앙분위기가 조성됩니다.


여러분 선교사들 수백 명 모여도 누구한데 기죽는 줄 알아요? 아마존 선교사 등장하면 기 팍 죽어버려요. 습도 90%, 최고기온 40도, 거기서 20년 살아보세요. 말라리아에 배길 사람 없어요. [아마존의 눈물] 찍었던 피디는 죽을 뻔 했잖아요. 거기서 20년 동안 봉사하신 분이 이번에 참석하려다 참석 못했는데.


그쪽 동네에서는 완전히 감히 엄두가 안 나요. 어떤 수도사는 높다란 기둥 위로 올라가서 내려오지도 않고 기도합니다. 아마 다른 사람은 70미터에 도전할 거예요.


수도원이 운영은 이콘 제작으로 연명하다가 나중에 성화나 명화 제작. 요새말로 토산물, 공예품 팔아서 운영했습니다. 게다가 옛날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걸 믿기 때문에 올레길에서 게스트 아우스 운영해서 유지했습니다. 올레길이 제주도가 최초가 아니고. 1092년도 우르바누스2세가 십자군운동 할 때 올레길 성폭행 방지한다고 cctv용으로 기사단들이 돌아다닙니다. 거기서 생긴 기사단이 템플기사단입니다. 이 수도원 사람들이 종교 재판이 성행할 때에는 재판관으로 채용됩니다.


‘형상+질료’가 사람이라면 이제 사람은 구원받으려면 내 형상, 내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영혼으로 인정받으면 기독교신자가 돼버리는 겁니다. 참 편리하죠. 그리고 목사한테 고백하기를 “제 몸은 땅에 죽고, 내 영혼은 우리 주님 품에 안깁니다.”고 고백하면 될 것이요. 왜냐하면 목사는 교회의 대표자이요 하나님의 대행자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 삼위일체마저 집어넣으면 더 세련된 신자가 될 것입니다.


스토아학파에서는 섭리개념을 언급합니다. 신이 세상을 운명적으로 섭리하는데 신은 초월자라 너무 신비로워서 말로 표현 못해요. 그래서 피조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신의 지시에 따라서 섭리하는 것이 곧 로고스가 하는 일입니다.


이게 기독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신은 있고 피조세계를 데미우르고스란 신이 창조했는데 데미우르고스는 스스로 활동하지 못하고 로고스를 통해서 다스리는데 로고스는 이성이니까 곧 신의 이성, 하나님의 질서가 다양성을 일자로 모으면서 신에게 찬양이 되고, 찬미가 되는 그런 구조로 이 세상은 짜여져 있다고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스토아 사상이 퍼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고대 유럽이 오늘날 한국교회보다 더 기독교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는 셈이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삽니까? 우리 속에 영혼을 신께 가까이 다가가도록 정화시키는 작업이 남아 있어요. 신의 성품을 유지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하나님 형상 닮기’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에서 강단에서 시도 때도 없이 계속 튀어나오는 말, 주의 형상 본받으라 하거든요. 그래놓고 설교 마지막에는 돈 내라는 구실로 사용하지만.


목사들의 주장은 이러합니다. “여러분 속에 신의 형상이 있는데 그 신의 형상을 박대해야 되겠습니까. 그렇게 박대해놓고 축복 받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 뻔뻔스럽습니다. 받은 게 있으면, 해먹은 게 있으면 내놔야 될 건데 그게 은혜를 아는 상식적인 사람입니다. 은혜받아 천국에 가면서 돈도 안내어놓는 인간은 나쁜 놈이요 은혜를 모르고 염치없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부흥집회의 주제입니다.


목회, 어렵지 않아요. “여러분의 아이가 아프고 공부 못하고 남편하고 싸우는 것은 다 신의 저주받아 그렇습니다. 여러분 속의 신의 형상을 회복해서 빨리 저주를 벗겨내란 말이죠.” 바로 이런 말들이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는 겁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합리적인 질서가 속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의 말을 듣고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그래 나는 신과 엮여져있어. 신은 나한테 뭘 원할까? 신에게 어떤 존재가 될까? 옳지. 내 속에 있는 신, 영혼이 있으니까 이 영혼을 신의 성품에 닮아가게 되면 주께서는 내가 원하는 부귀영화를 보너스로 채워줄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선배들이나 후배들이나 모든 인간들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겁니다. 그것으로 자기는 같은 교인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동의하고 같이 사도신경 외우기 때문에 우리는 형제라고 여기고 형제간의 결속과 우애와 친교와 계모임을 나누기만 하면 됩니다. 교회가 실질적으로 운영되려면 여기에서 뭔가 더 필요한 게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익히 몸으로 체험되는 철학이 스토아적 운명체험이요 스토아적 윤리, 도덕인식입니다.


스토아학파에서 신의 섭리라 할 때 다른 말로 하면, ‘운명’입니다. 운명이라서 일층 서랍, 이층 서랍에 들어가는 것은 이미 신이 짜놓은 계획대로 되기 때문에 네가 거기서 저항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저항하면 너만 힘들다는 말입니다. 선택론이에요. 네가 정해진 위치, 네 위치에 들어갈 때 전체로 봐서 유용하니까 네 몫을 다 할 때 너는 선한 존재가 된다. 그래서 너의 사적인 목적과 여러 가지 목적이 모여서 총체적으로 신의 목적에 도달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 스토아가 나왔으니까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약간의 차이점이 있어요. 플라톤은 말하기를 “세상은 전부다 헛것이니까 진짜는 하늘나라에 있으니까 빨리 하늘나라로 가자. 동굴의 우상이라 해서 동굴 속에 있다 밖에 나가면 같이 있다는 걸 알듯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서 신의 나라에 가면 그동안 우리가 같이 있었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400년, 500년 전에 다 이야기를 다 했다 이 말이에요.


거기에 나온 단어들이 성경번역에 다 들어가면서 그것이 로마제국 통째로 모든 국민들이 예외 없이 전부다 일괄적으로 기독교신자로 결속을 다지는데 아주 유용하게 그 철학들이 동원이 된 겁니다.


10분 쉽시다.

 

녹취 :한 윤범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