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분 쉽시다. 디모데전후서 제 4강
역사라는 것은 죽이는 것이고 묵시만 살립니다. 십자가를 하나님께서 묵시와 역사가 만나는 유일한 지점으로 보는 겁니다. 역사가 십자가와 만날 때는 그냥 만나지 못하고 십자가의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명하는 속성을 가지고 여기에 배치되어 있던 모든 것들이 다 어디로 쏠리느냐하면 십자가에 예수님을 죽게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 자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들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을 죽이는 거예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잖아요. 하나님은 죽어버린 하나님을 이 땅에 제시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죽어버리면 사람은 내가 살기 위해서 나보다 더 잘 살아있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현재 죽을까 염려되는 나를 살려낼 수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나는 살아 있다. 그런데 지금 아슬아슬하다. 그런데 확실하게 살아 있는 분은 누구지? 그렇지, 하나님이구나. 그러면 살아있는 하나님은 안 죽으니까 죽지 않는 하나님이 죽어가는 나를 살려내는 유일한 대안이다.’ 그렇게 해서 신을 믿거든요. 왜, 신은 칼로 긋거나 총으로 쏴도 안 죽으니까. 그런데 허약하게 사람 손에 의해서 재판받아 죽어버린 하나님은 아무도 묻지 않는 겁니다.
그것이 어리석은 십자가에 담긴 비밀입니다. 어떻게 죽은 분이, 본인도 죽어가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을 살릴 수가 있습니까? 이것 때문에 십자가는 그냥 한 개가 아니라 두 개의 보조 십자가를 장치로 해서 그 보조십자가 위에서 십자가를 알리도록 했습니다. 이 보조 십자가는 두 사람의 강도인데요, 그때 강도가 세 사람이 잡혔으면 큰일 날 뻔 했지요.
두 사람의 강도는 어디서 흘러온 강도인가, 이 세상에 밥 먹고 살려고 애썼던 두 사람의 강도를 배치했습니다. 이것은 역사에 관한거지요. 역사 속에서 살려고 애쓴……, (다시 해야 된다고요? 예, 다시! *영상작업 때문에)
십자가는 역사와 묵시의 만남인데 모든 것을 죽이는 것이 역사고 그것을 살려내는 것은 묵시가 되는 겁니다. 이 역사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죽이는 재료가 되고 그 일에 소모가 되는 원료가 되지요. 모든 배치와 배열들이 예수님을 죽이는데 동원되게 되어 있습니다. 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땅도 하늘도 그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을 죽이는 쪽으로 배치가 되어 있는데 이 십자가에서 보여준 하나님은 사는 하나님이 아니고 죽은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죽은 하나님을 이야기해버리면, 역사 속에 있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마귀에 속해서 죽기가 무서워서 안 죽으려고 ‘죽으면 안 돼, 죽으면 안 돼, 살아야 돼.’ 하지요. 남이 사는 것은 소용없어요. 나의 것이기에, ‘나의 것은 영원무궁해야 돼. 옆 사람은 죽으나 사나 나와 상관없고 내가 살아야 돼.’라는 것은 인간이고 ‘나는 죽어야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고.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점에서 살아야 되겠다는 그 인간이 죽은 하나님을 하등 믿을 이유가 없어요.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 십자가 밑에 작은 새끼 십자가 두 개를 해놓고 인간의 모든 역사의 모델로서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동안 자기들이 역사 속에서 살아온 그 버릇, 행세가 있어요. 그게 뭐냐, ‘나를 살려주면 그 사람을 믿겠다.’ 이런 식으로 나가는 거예요. 예수님 옆의 강도가 그렇게 이야기했지요?
그런데 지금 그 예수님께서 죽어가면서도 자꾸 자기가 구원자라고 우기는 거예요. ‘나를 믿으라. 내가 구원자다.’ 그런데 본인은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구원자라고 하니까 구원자라면 구원받을 수 있고 납득이 될 수 있는 뭔가가 제시되어야 하는데 무조건 자기를 구원자라고 하니까 뭘 가지고, 어떻게? 물론 본인이 살아있고 죽은 척을 하면서 갑자기 천사를 불러내면 ‘아, 천사를 보니 그렇구나.’ 할 수 있는데 본인이 지금 같이 죽어가고 있어요.
같이 죽어가고 있는데 구원자라고 하니까 납득이 안 되고 역시 그 나머지 한쪽 강도도 납득이 안돼요. 둘 다 처음에 예수님을 다 부정했습니다. 다 같이 한 짝이 되어서 예수님을 조롱했어요. ‘우리는 강도로서 겸손한 면이라도 있는데 저 인간은 죄를 지어놓고는 스스로 구원자라고 하니 저런 말도 안 되는 황소고집은 대체 튀어나온 거야?’ 했는데 무슨 영문인지 한쪽의 강도가 ‘오늘밤에 낙원에 가게 해 달라. 당신은 낙원에서 오신 분이다.’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죽은 하나님이 살려낸다.’ 이 공식이 성립되지요. 죽은 하나님만이 살려낸다는 것. 죽은 하나님이 살려내기 때문에 ‘산다’는 이 개념은 역사 속에서 우리가 꾸준히 학습되어왔고 배워온 그 사는 것 하고는 다른 ‘산다’가 되는 거예요. 같은 종류의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식으로 산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사셨던 그것이 생명이라면, 그것이 생명나무고 그것이 생명이라면 우리는 졸지에 평소에 살려고 한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죄의 형태임을 수용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자진해서 일어날 수는 없는 현상입니다. 그야말로 십자가의 영, 예수님의 성령이 임해야 비로소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사람의 힘으로 알았으면 절대로 이분을 절대로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라고 고린도전서 2장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이 터어키, 아시아와 마케도니아등지의 가는 곳마다 다 전했다는 말이지요. 빌립보, 데살로니가, 뵈뢰아, 아테네, 고린도, 에베소……, 이 고린도와 에베소가 2차전도와 3차 전도에서 양 축이 돼요.
여기 갔다, 또 여기로 갔다, 사도바울은 되게 바빠요. 에베소에 갔는데 고린도에 말썽이 있으니까 그리로 갔다가 다시 저쪽에 말썽이 생기면 그쪽으로 갔다가 에베소, 고린도, 고린도 에베소, 왔다갔다 왔다 갔다 하면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전부 죽여 버리는 거예요. ‘죽은 인간이 왜 그리 말이 많나?’ 그 말입니다.
미꾸라지 잡아서 소금 끼얹어 놓으면 가만있잖아요. 그런데 소금기가 없어지면 또 살아서 바둥바둥 대잖아요. 그러면 소금 또 끼얹어버려요. ‘이래도 안 죽어? 좀 죽어줘.’ 그 말입니다. 내가 살려고 한 그 것이 너의 구원을 방해하고 훼방하는 마귀의 최후의 무기, ‘너 그러면 죽는데?’ 라는 그것인데 소금을 쳐서 제발 ‘죽어도 마땅합니다.’라는 쪽으로 계속 나가라는 말이지요.
그 전도를 한 거예요. 그런데 그 당시 유대인의 회당에서는 뭡니까? 우리는 선택받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면 죽는다, 산다? ‘살 수 있습니다! 하면 됩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종교적 의미였습니다. ‘나는 율법 지키면 살 수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십자가 믿고 부활 지키면 살 수 있습니다.’라는 그 이야기를 한 거예요. 십자가 믿고 산다는 것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사도바울 같으면 이렇게 이야기가 됩니다. ‘십자가는 나를 죽이고 이제 내가 사는 것은 십자가로 끝났고 이제부터 사는 것은 내 안에서’…… 누가 산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성경 그대로 이야기하는데도 시비 거는데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그러면 성경을 제가 지어낼까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 그대로잖아요.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계속해서 율법을 동원시킬 수밖에 없는 겁니다. 왜 그런가, 성령께서 그것을 시켰고 성령께서는 왜 그것을 시키는가?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지기까지의……, 이 십자가너머는 창세전의 세계니까 십자가 이쪽의 땅의 나라는 창세후의 세계, 이 땅에서 일어났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의 그 행적, 기적만이 아니고 모든 말씀과 그 행적의 모든 것을 그대로 사도바울의 1차, 2차, 3차 전도여행에 다 적용시킵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잘못된 해석에 대해서 공격하듯이 사도바울도 율법에 대해서 잘못된 해석을 공격 할 수밖에 없고 오늘날 우리들도 현재 말씀, 율법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 대해서 공격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좋게 지낼 문제가 아닙니다. 좋게 지내버리면 서로 다 살기 때문에 서로 다 죽어요. 서로 죽여줘야 그것이 살아요. 서로 못났으니까 우리가 다 십자가 바라봅시다, 그것으로 끝나버려야 합니다.
‘다 죽이는 십자가 바라봅시다.’ 하면 ‘너만 십자가 바라보나?’라고 나의 것이 또 튀어나오지요. 여기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나 에베소서나 고린도, 데살로니가 이런 데로 보낸 편지 속에 담겨 있는 그 복음은 어떤 의미에서 그 복음을 전했는가? 그것은 바로 ‘율법은 필이 무엇을 요구하는가, 행함을 요구한다.’ 이것은 문제없어요.
율법은 행함을 요구하는데 율법이 행함을 요구할 때, 행함은 인간에게 요구하고 율법은 선한 것이므로 하나님 쪽에서 주어집니다. 주어지게 되면 하나님 쪽에서 주어진 율법과 그 율법을 행했다는 인간 사이에서 뭐가 깨어지느냐하면 ‘이것이 바로 경건치 않은 것이고 죄인 되고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식으로 율법은 까발리는 거예요.
그러면 이 틈 사이에 뭐가 주어지느냐하면 ‘경건치 않은 자, 죄인 된 자, 하나님의 원수 된 자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피를 흘렸다.’고 이야기를 해버립니다. 그렇다면 역사 속에서 부활이란 뭐냐 하면, 반복되는 것이 부활이에요. 이것은 지난시간에 했지요? 무엇의 반복? 십자가가 반복되는 것, 여러분 속에 십자가가 반복될 때 그것은 여러분의 뜻이 아니고 성령께서 여러분을 그렇게 인도하고 있습니다. 왜 십자가가 반복해서 주어지느냐하면, 25살 때 지은 죄에 대해서 25살 때 십자가 피로 용서를 받았는데 사람이 살아야 되니 26살 때도 어떤 행함이 나올 것이잖아요. 그런데 죄 된 행함이라는 것이 없어요.
죄 된 행함이라는 것이 없고 행함이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죄악 된 행함이라는 것이 없어요. 모든 행함은 죄로 등장시키도록 율법이 무엇으로 바뀝니까, 말씀이 계속 일을 해 대는 겁니다. 모든 성경말씀은 그 배치가 십자가를 향하여 다 질주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입으로 네가 십자가와 부활을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것을 22살 때로 봅시다. 그러면 23살 때는 고백 안 해도 됩니까? 23살 때는 23살 되어서 일어나는 행함이 또 있을 것이고 그 행함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뭐가 되느냐, 경건치 않은 자, 죄인 된 자, 하나님의 원수 된 자가 또 등장하는 겁니다. 또 등장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과 그 틈 사이에서 이것을 의가 되게 한 십자가 피를 또 바라보게 만들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자기의 경건치 않음을 위하여 예수님이 돌아가셨다는 이 십자가를 다시 한 번 보게 됩니다. 그러면 그 십자가가 어떤 십자가냐 하면 살리는 십자가가 돼요. 죽이는 말씀이 곧 살려주는 말씀이 되는 겁니다. 살려주는 말씀으로 살았다, 하는 그 인간을 24살 때 또 죽여 버려요. 또 살려내고 25살 때 또 죽여 버리고 또 살려내고, 그래서 89세 어느 날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 그렇게 합니다.
89세, 92세, 그것이 부활 속에 있는 사람이고 성령 안에 있는 거예요. 로마서 14장 17절에서 ‘하늘나라는 의와 평화, 화평이다.’ 합니다. 그 화평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주어지지 내가 말씀 지켰다는 것으로 화평이 오지를 않습니다. 그 지켰다는 그것이 또 다른 말씀에 의해서 죄로 지적되게 되면 화평이 다 깨져버려요.
자기는 분명히 말씀대로 살았다고 여겼는데 어느 대목을 딱 보니까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 합니다. ‘간식이 없다고 삐졌는데 이것도 죄겠구나. 전에는 간식이 풍성했었는데, 그 때는 어떤 분이 수고를 많이 해서 감자니 옥수수가 너무 많아서 다 처치를 못할 정도였는데 이제는 휭 하니 하나도 없구나.’
주최 측은 뭐하나, 하는데 여러분들이 다 주최 측이에요. 역사라는 것은 다 죽어요. 그런데 여기에 묵시가 개입했다는 것이 우리를 살려내는 겁니다. 그러니 묵시와 역사의 만남은 하나밖에 없어요. 그것은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입니다. 그것은 어디에 따르는가, 구약의 제사법에 따라요. 피! 그 피는 부활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피가 주어집니다.
아들의 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구약의 제사 같은 경우에는 반복하잖아요. 지난번에 한 것 다시 해 봅시다. 유월절에 어린양이 있을 때 여기서 히브리인들이 죽을 뻔 했지요. 죽을 뻔 했다가 어린양의 피로 장자가 살아났습니다. 그러면 죽은 어린양이 어디에 살아 있겠는가, 이 어린양의 가치가 어디에 있겠는가?
시내 산 제사법에 의해서 어린양의 매일같이 죽어요. 이 사람들이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해서 죽었던 그분의 세계로 이끌려 가는 겁니다. 그것이 약속의 땅으로 가는 거예요. 약속의 땅으로 가는데 그 사람들은 살던 버릇이 땅위에서 살던 그 버릇이기 때문에 땅만 있으면 살 줄 알았습니다. 땅만 있으면 우리 힘으로 개간하면 되니까.
‘땅만 주면 살겠습니다.’ 그러나 약속이 광야에서 하는 말은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야.’ 산다는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겠다는 거예요.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신명기 8장에서 이야기하기 위해서 만나를 준겁니다. 만나를 준 것은 ‘네가 이렇게 원망했었다.’ 하는 겁니다. 만나를 뜯어보면 ‘원망1, 원망2, 원망3……’ 전부 다 들어 있어요.
원망했고 불평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그 양식이거든요. 오늘날 그 양식이 말씀이라면 그 말씀 안에는 뭐가 들어 있습니까? 우리의 원망, 불평, 원망, 불평, 하나님에 대한 대듦, 이런 것들이 포함된 말씀이기에 말씀해석은 반드시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합니까?’라는 원망이 그 안에 담겨 있는 채로 말씀이 해석되어져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 목사님들이 설교하실 때 ‘여러분이 교회오시는 목적이 여러분이 살려고 한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또 죽이는 일입니다.’라는 식으로 설교를 해야 된다 그 말이지요.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교회 왔지만 여러분은 살기 이전에 이미 왜 죽는가의 그 이유를 알고서 교회 왔었어야 됩니다.’ 그 말입니다.
‘우리가 왜 시들시들 죽어가고 있습니까? 그 이유가 정당합니까, 정당하지 못한 겁니까? 어떤 점에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힘들게 살아가는 것이 합당한 조치가 되는 겁니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교회 나와야 된다는 말이지요. 아무도 안 나오지요. 여행사 찾아가는 이유는 놀러가기 위함인데 ‘귀신 나오는 곳을 소개해 드릴까요?’ 하면 그 여행사가 장사가 되겠어요?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상품을 개발해야 고객들이 만족할 것이 아닙니까? 고객이 왕이니까. 성경에서는 고객의 왕은 마귀라는 거예요. 그 점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복음 전하는 것도 인간의 힘이 아닌 것처럼 그것을 알아먹는 것도 인간의 힘이 아니에요. 이것은 성령의 힘이 아니면 못 알아먹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많은 목회자들이 이렇게 이야기들을 해요. 그런 사람들을 찾게 되면 장사가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은 몇 명 되지가 않는다는 거예요. 문제는 나의 것을 그릇으로 따로 만들어놓고 여기에 몇 명 채우는가, 하는데 이 그릇자체가 주께서 인정하지 않는 그릇입니다. 거기에 몇 명 채우는가,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리고 다섯 명을 채웠다고 봅시다. 다섯 명 채웠다고 하니 녹매교회 비슷한데, 이 교인들이 언제 갈지, 언제 청매로 갈지, 언제 이사 갈지 모르잖아요. 이게 누구겁니까? 주님의 것이라는 말이지요. 나의 것이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을 왔다갔다, 왔다 갔다 하게 하시면서 이것을 깨닫게 하시는 축복을 주시는 겁니다.
이 축복이 축복에 해당될지 그것은 모르겠습니다만 왔다가 또 갔다가 또 때려치우고 왔다가, 이런 것을 통해서 주께서는 나의 것이라는 것이 하늘나라에서 전혀 쓸데없고 방해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이것은 교회뿐만 아니고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도 이렇고 이런 스케줄대로 가 줘야 내 자식이라고 여기겠는데 왔다 갔다, 왔다 갔다, 경계선을 막 넘어 다니니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어지러워요, 너무 왔다 갔다 해서.
가정이 나의 가정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대로 ‘누구든지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어미나 전토나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는 그 말씀이 자기는 자식 번듯하게 잘 키워내면 그것은 죄가 아닌 줄 알았는데 마태복음 27장의 그 말씀을 대보면 ‘아, 이것도 죄구나.’ 하게 되지요.
어떤 사람은 자기 아버지 죽었을 때 운 것이 죄 아닌 줄 알았는데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자기 아버지 죽어서 장례 치른다고 신경 쓴 그것도 죄구나, 그러니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벌이고 있는 모든 행함은 이 행함의 원리, 이 애굽 같은 행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음을 분명하게 굳히기에 들어갑니다. 유도에서 상대선수에게 굳히기에 들어가듯이.
꼼짝 못하고 우리는 그 동안 세상에서 했던 그 행세를 그대로 되풀이해야 됩니다. 주님께서는 같이 따라붙어서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계속 꼭 노라조 같아요.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 계속, 계속 살리는 거예요. 계속 살려주는 거예요. 계속! 그래서 이것은 ‘쪄 빠따(저 바다)에 누워.’처럼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늘 공급받고 있는 겁니다.
‘네가 지난여름날에 한 짓을 나는 알고 있다.’ 그거거든요.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다 아니까 그것을 잘했다고 가지고 나오지 마라. 중요한 것은 너를 용서했던 그 그리스도의 역사와 묵시의 만남의 초점, 그 피가 있으면 구약의 모세 언약대로 피가 있으면 사함을 받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자기가 용서하는 그 자체를 만끽하고 싶은 겁니다.
따라서 거기서는 탕자가 필요하고 죄인이 필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역할을 우리가 해줘야 되는데 탕자 안 되려고 하고 죄인 안 되려고 하면 그것은 남의 자식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죄인이고 탕자라 하는 관점은 뭐냐, 지상의 관점이 아닙니다. 십자가 안에 있는 하늘나라 관점에서 볼 때 탕자고 죄이기 때문에 지상에서 같은 인간들끼리 죄라고 하는 그 의미, 그 뉘앙스는 믿지 마세요.
‘네가 죄인이다.’ 해도 거기에 기죽지 마세요. 주님의 십자가에서 보기에 우리는 죄인이지 다른 사람이 지적하게 되면 그것은 죄라고 볼 수가 없는 겁니다. ‘너나 잘하세요.’ 해야 되지요. 제가 주일 오전에 그 이야기를 했지요. 사람이 부러운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어 있어요. <위대한 탄생>이라는 프로그램에 보면 멘토라는 것이 있잖아요.
그 사람의 멘토는 무슨 멘토냐 하면 노래 잘부를수 있게 해주는 멘토에요. 그런데 노래 잘 부르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한테는 그 사람은 전혀 멘토가 아닙니다. ‘아저씨, 제가 노래 잘 부를 수 있게 해 드릴까요?’ ‘저리가소. 내가 노래 잘 불러서 뭐할 것인데? 저리 가소.’ 전혀 그 사람에게는 카리스마가 먹히지 않겠지요.
카리스마가 먹힌다는 것은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저쪽이 갖고 있고 내가 부러워하는 것을 저쪽이 갖고 있으니까 저 사람 것을 갖기 위해서는 내가 저 사람 앞에 고개를 숙이면 언젠가는 저 사람 것이 내 것으로 되겠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부러운 동시에 ‘내게 없는 것을 왜 저 사람은 갖고 있지? 아마 하나님의 특수한 능력과 특수한 어떤 끼가 있는 모양이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기가 죽고 그 다음부터 무서워지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하려거든 여기 나오지 마세요.’ 하면 ‘아이고, 안됩니다.’ 눈물 막 흘리고 ‘합격!’ 하면 또 좋아서 울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이고! 그게 뭔데! 그게 뭐라고, 노래방에 가서 한곡 뽑으면 확 풀리는 것을 가지고, 조수미한테 가서 물어보면 그것도 노래인지, 그것은 노래도 아니죠, 뭐.
그것이 뭐라고 매여서 인생을 거기에 걸고 울고불고 ‘감사합니다!’ 하면서 좋아하고 떨어졌다고 욕을 하고 삐지고. 분명히 그 사람은 뭔가 자기가 노리는바가 있는데 그것이 성취가 안 되니까 화풀이를 해 대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예수님을 죽게 만든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기들이 얼마나 착하고 의롭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 예수님을 멘토로 삼았는데 예수님께서는 너 같은 제자들을 삼은 적이 없거든요.
예수님이 제자로 삼은 사람들은 전부 다 고기 잡는 사람들, 죄인인 사람들, 나중에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을 팔아먹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멘토로 등장했지 훌륭한 사람들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주께서 세리와 창기, 이런 사람들은 용서하시고 바리새인들은 하늘나라 못 가게 만들고.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근원적인 것, 우리가 기대하는 것, ‘주께서 나한테 이렇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는 그 건의사항마저 물리쳐 버립니다. ‘너는 아직도 너 자신이 누군지를 몰라. 모르기 때문에 이것은 부족한데 이것은 괜찮다는 식으로 스스로 부족한 것과 괜찮은 것을 골라내겠다는 그 성질머리를 버려야 돼.’
누가복음 18장의 세리처럼 차라리 몽땅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하라는 말이지요. ‘십일조 했습니다, 금식 했습니다, 구제했습니다, 봉사했습니다.’ 그 따위 소리를 하지 말고 그저 성전에 나왔으면 고개도 못 들 때 주께서 ‘네가 의인이다.’ 주님께서 멘토로서, 스승으로서 이야기하는 것은 제자들에게 뭘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가만 있거라. 내가 다 해줄게.’입니다.
시편 몇 편인지 이런 대목이 있어서 한 10년 전에 은혜를 받은 게 있어요. ‘너무 높은 곳에 마음 두지 말고 진짜 성도라면 젖 뗀 아이가 어미 품에서 잠자고 있는 것처럼, 듬직한 어미의 품에 안겨서 잠잘 수 있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성도다.’ 하는 대목이 나와요.
시편 131편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젖 뗀 아이가그 어미품에 있음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죽기 전에 해야 될 스무 가지 중에서 마지막이 뭐냐 하면 사랑하는 사람 품에서 죽는 거예요. 김 선아가 그렇게 이야기해요.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서 죽는 것, 그렇게 되려면 사랑하는 사람을 본인이 선택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찾아와야 되는데 그 찾아오는 방법이 너무 과격해요. 꼭 김○○ 집사님 같아요. 너무 과격해.
원래 디모데전서에 보면 사람 이름이 여럿 나옵니다. 알렉산더랄지 이런 이름들이 등장해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사도바울은 여호와 증인 같다고 했지요. 남 영업하는데 가서 ‘여러분, 율법은 여러분의 가치를 높이는 용도가 아니고 율법은 왜 예수님이 죽을 수밖에 없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진 것입니다.’ 라는 이야기를 가는 곳마다 하니까 율법에 매여 있던 그 사람들이 그냥 두지 않고 달려들지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라 하는 것은 여러분의 구원욕구를 들어주는 것이 말씀이 아니고 그 말씀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구원받을 자격도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어진 겁니다. 그냥 집에 가 계시면 구원될지 안 될지는 성령이 찾아가야 되는 것이지 백날 교회 와봐야 소용없습니다.’ 이렇게 할 때 그들이 격분하지 않을수가 없지요.
어떻게 격분합니까? 이렇게 합니다. ‘내가 완벽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내 과거를 돌아보면 나쁜 것이 많다. 하지만 전적으로 나쁜 것이 아니다. 왜, 예수 믿는 것, 복음 전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잖아.’ 이렇게 나옵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요. 다른 것은 나쁜 것인 줄 알지만 예수 믿고 복음 전하고 성령의 은사를 받아서 감사함으로 헌금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거예요. 앞에 성령이 붙고 은혜가 붙었으니까 그것이 죄가 아니라는 거지요.
어디서 문제가 되었는지를 한번 적어볼게요. 간단합니다. 한번 적어볼게요. 성령의 은혜를 받고 교회 감사헌금 한 것은 죄가 아니니 뭐가 되겠어요?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그렇게 주장하는 그 사람의 자리가 어디에 놓여 있겠습니까? 이 안에 들어 있겠습니까, 바깥에 나가 있겠습니까? 바깥에 나가 있는 거예요.
나의 것이 있는데 나의 것을 성령이 와서 안 건드린다는 거예요. 성령께서 헌금 들고 와서 ‘얘야, 내 대신 교회에 내라.’ ‘감사합니다. 대신 저의 가치는 안 건드리지요?’ ‘안 건드리지. 너는 착하니까 안 건드리지. 내면서 그것은 성령의 은혜로 감동해서 냈다고 해라.’ ‘예’ 그러면 자기 자신을 건드리지 않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진짜 성령의 은혜를 받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성령의 은혜를 받게 되면, 성령의 은혜라 하는 것은 묵시세계 아닙니까? 묵시세계는 뭘 앞장세운다고 했습니까? 뭘 앞장세우지요, 반드시? 십자가를 앞장세우지요. 온 땅을 뭐로 바꾼다? 죽음의 도탄의 세계로 바꿔버리지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내가 망할 백성중의 한 사람’이라고 누가 이야기 했어요?
이사야가 이야기했어요. 이사야 6장의 이야기 아닙니까? 그러면 성령이 와서 십자가를 앞장세우게 되면 내가 앞으로 전도를 하든지 헌금을 하든지 어떤 행동을 하든지 이것이 뭐가 된다? 이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지요. 죄가 되게 되면 나는 뭐가 됩니까? 나는 뭘 해도 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하지요. 뭘 해도, 그 ‘뭘 해도’ 중의 하나가 헌금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이 노선이 관찰자의 노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로 갑니까? 이 안에 들어와 버려요. 이 안에 들어와 버리면 돈을 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뭘 내는 겁니까? 하나님께 ‘돈 받으세요.’ 가 아니라 ‘죄 많은 저를 받아주시옵소서.’ 해서 본인이 헌금이라. 어떤 헌금? 착한 헌금? 아니에요. ‘이 죄인을 받으시옵소서. 지금 헌금 내는 이 순간 벼락이 쳐서 나는 죽는다고 할지라도 저는 스데반 집사처럼 주 안에서 죽으니까 너무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게 돼요.
그러면 이런 모습을 보고 제 삼자가 뭐라고 합니까? ‘야, 저분은 성령의 은혜를 받아서 헌금한다.’ 하겠지요. 제 삼자가 그렇게 하는데 본인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돼요? 본인이 제 삼자입니까? 논리가 안 어려운데 어렵다는 얼굴들을 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어렵습니까? 본인은 돈을 바친 것이 아니고 이 죄인을 받아 달라는 식으로 자기 몸을 드렸는데 다른 사람이 보면서 ‘야, 저분이 저렇게 헌금하네. 참 은혜롭다.’라고 제 삼자가 이야기할 수 있어요.
제 삼자가 뭘 봅니까? 그 사람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굴 칭찬해요? 그 사람을 저렇게 죄인으로 몰락시킨 누구를 칭찬하고 있습니까? 성령, 주님의 십자가의 묵시적 살아 있음을 감사하지요. ‘세상에, 없는 사람이 헌금을 하는데 20원을 헌금해요. 동전 두 렙돈을 헌금했다고!’ 다른 사람이 감격하는 거예요.
목사가 나서서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어느 혼자 사는 분이 20원을 헌금했는데 자기전 재산을 다 바쳤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멘, 감사합니다. 부자가 헌금 많이 한 것보다 훨씬 낫다.’ 이렇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뭐라고 합니까? ‘저 어때요, 헌금 괜찮게 했지요? 제가 성령의 은혜를 받아서 했어요. 이번 헌금 잘 나왔지요?’ 이런 소리를 본인은 합니까, 안합니까?
본인이 그런 소리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왜 이걸 왜 보호해줍니까? 본인이 죄인인데. 보호받는 본인이 짜증나요. 자기는 죄를 느끼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훌륭하다고 해버리면 본인이 짜증난다고요. ‘내가 주의 복음을 잘못 전했나? 내가 헌금을 잘못했는가? 내가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케 하였나? 나는 헌금을 한 것이 아니고 내 죄를 고백했을 뿐인데 다른 사람은 헌금을 했다고 하니 내가 헌금을 잘못했는지 아니면 저 사람들이 문제일까?’ 하고 오히려 의아해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헌금하세요.’라는 설교를 목사가 하게 하면 안돼요. ‘헌금하세요.’라는 설교를 목사가 하면 안돼요. 이 문제를 조금 더 나가봅시다. 예를 들어서 아굴라와 부리스길라, 이 부부는 이탈리아에서 천막장사를 하던 사람인데 로마 황제가 유대인들은 다 나가라는 영을 내리니까 쫓겨나서 마케도니아로 와서 사도바울을 만나서 천막 치는 일에 동업을 했어요.
그래서 같이 고린도로 갔다가 바울이 ‘당신이 내가 없을 때 책임을 지고 이곳을 맡으라.’ 해서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사도바울이 어려울 때 많이 도와준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성경을 봅시다. ‘아굴라와 부리스길라가 내가 어려울 때 많이 도와줬다.’고 하는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본문입니다.
이걸 쉽게 하면 뭐가 됩니까? ‘감사헌금하세요.’ 라는 말과 똑같은 것이거든요. ‘내가 어려울 때 헌금으로 도와줬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복음에 필요할 때 감사헌금을 하세요.’라고 성경에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성경에 나오기 때문에 어떤 목사가 ‘여러분도 복음에 필요할 때 헌금을 하세요.’라고 하면 그 설교가 맞느냐, 맞는 성경해석이냐 그 말입니다.
성경에 있는데. 간단한 문제 아닙니까? ‘성경에 행하라는 것이 있어서 행하라고 했는데 그것이 뭐가 잘못인가?’ 같은 이야기라니까요. ‘이렇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사도바울을 도와줬기 때문에 여러분도 나를 도와줘야 됩니다.’라고 성경에 나오는 글자 그대로 설교한 그것이 맞느냐, 틀리느냐 그 말입니다. 물어봅시다.
제가 원칙이 뭐라고 했습니까? 성경말씀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을 다 보라고 했지요. 하나는 육으로, 문자로 보는 해석이 있고 또 하나는 뭡니까? 묵시로 보는 해석이 있잖아요. 묵시로 보면 어떤 행동을 해도 뭐다? 다 죄가 된다고 분명히 언급했지요. 했지만 30분도 안 지나서 다 잊어버렸어요. 성경대로 하는 그 설교가 죄입니까, 죄가 아닙니까? 그게 죄지요.
왜냐하면 성경 모든 말씀 안에 십자가가 들어있고 십자가는 드러난 역사적 해석과 숨어 있는 묵시적 해석의 양쪽을 다 보여준 사건이 십자가사건이고 그 십자가사건이 성령을 통해서 어떻게 한다? 되풀이하는 그것이 부활의 능력으로 가능하잖아요. 그러면 어떤 목사가 이 성경이 그대로 하라고 한다고 해서 그대로 했다, 라고 하면서 그것이 뭐가 잘못되었느냐, 라고 했다.
성경문자를 그냥 읽어줄 것 같으면 설교라는 것이 필요가 없습니다. 아나운서나 발음이 좋은 사람을 골라서 이 성경을 읽게 하고 그냥 내려가게 하면 돼요. 천주교에서는 그렇게 하는데도 있어요. 성경 읽고 아무소리 하지 말고 그냥 내려가요. 왜, 성령에게 맡긴다고. 그것은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그럴 것 같으면 성당 갈 필요도 없어요. 집에다 베들레헴이라는 성경프로그램 있잖아요, 그것 설치하고 집에서 그거나 보면 돼요.
성당에 뭐 하러 갑니까? 떡은 왜 주는 거예요? 왜 가운입고 앞에서 설치고 난리합니까? 그럴 필요도 없어요. 오늘날 성령이 임한 사람은 하나의 사도가 되고 부활의 증인으로서, 십자가 증인으로서 활동케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지상이 바로 마지막 죽음의 땅이니까. 그 땅에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반드시 십자가의 능력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바울을 도와줬다.’는 이 본문을 설교할 때는 반드시 뭘 집어넣어야 됩니까? 십자가의 뜻을 집어넣어서 설교를 풀어내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설교하는 본인이 십자가복음에 의해서 이 본문을 평소에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하는 자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하는 대목이 나오지요.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복음 전하는 사람을 위하여 복음 전하는데 필요한 물자를 대주라는 말이지요. 일하는데 망을 씌워서 일하지 못하게 하는 일 없도록, 곧 망 값 내라는 말인데 그 이야기를 설명하면서 그것이 육적인 해석에서, 곧 살기 위해서 이것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는가를 이야기해주고 이미 십자가지신 예수님께서 이 본문을 해석할 때는 어떤 요소가 가미되면서 이 본문이 해석되는가, 둘 다를 설명을 해줘야 됩니다.
설명을 해줘야 그 말씀으로 역사에 속한 사람과 묵시에 속한 사람이 분류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냥 성경 읽기는 성경외우기에 불과해요. 성경외우기는 여호와의 증인이나 선교단체에서 많이 하고 있어요. 하지만 외운다는 것은 습관이고 그냥 반복에 불과합니다. 야구선수가 장마가 져서 경기가 여러 번 취소되다 보면 타격감이 떨어져요. 그런데 계속 할 때는 타격감이 살아납니다.
특히 이 대호선수, 장마기간에 슬럼프에 빠져서 홈런 21개에 멈췄다가 어제 두 개 때려서 23개 되었는데 사람이 자기 몸에 습관을 들인다는 것은 자기 몸의 가치를 높인다는 겁니다. ‘나 이만한 재주 있어.’ 그거잖아요. 그러면 그 재주가 하늘나라에 합당한 겁니까? 성경 구절 많이 외우는 그 재주가 하늘나라에 합당한 재주에요?
성경구절을 외우고 뭘 안다는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내가 성경구절가지고 어떤 식으로 이용하는지를 고발하는 차원에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살아 있는 말씀으로 묵시적 말씀으로 다가와야 돼요. 성경말씀 외워서 선교에 써먹겠다는 그 발상자체, 이것도 어디에 포함된다? 모든 죄악 된 행함에 포함되는 이유를 내가 외우는 성경말씀 속에서 찾아낼 수 있어야 된다 그 말입니다.
그래야 자기부인이 돼요. 설교하는 것도 죄가 되고 전도하는 것도 죄가 되고 이 모든 것도 죄가 되고 집안에 그냥 있어도 죄가 되고 전부 다 죄가 되는데 그냥 죄라고 하지 말고 죄 된 이유를 아는 그 바늘귀에 무슨 실이 있느냐하면, 바로 우리를 구원해내는 실, 묵시적 생명의 실이 그 뒤에 있거든요.
‘교회 안 나가도 구원받는다면서?’ 그것은 아니지요. 왜, 막산다고 해서 그것을 구원됩니까? 그것을 크게 쓰고 싶었어요. 십자가마을에 ‘막 살아서 구원 안 된다.’고 크게 쓰고 싶었어요. 막살아도 구원 안 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것은 막 살아도 구원과 아무 관계가 없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끝에 달린 실입니다. 그 실이 십자가에서 나온 실이라 그 말이지요. 실 잘라버리고 바늘만 쥐고 ‘난 막 안사니까 구원 받았다.’ 그런식으로 하면 안된다 그 말이지요.
반드시 끈이 있어야 돼요. 하늘나라에서 달린 끈이 있어야 된다 그 말이지요. 그 끈은 이 땅에서 무슨 짓을 해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일 수밖에 없는, 피를 흘리게 할 수 밖에 없는 강도와 같은 유의 죄에 불과한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이 땅에서의 우리의 아이디어는 하나밖에 없어요. ‘어떻게 하면 나를 살릴 수 있고 어떻게 하면 죽어서도 좋은 천국에 갈 수 있는가?’ 그런 아이디어만 쏟아내는 것이 이 땅에서의 모든 종교생활입니다.
그런데 그 자체가 십자가에서 막혀버렸다니까요. 다 막혀버리고 살고 안 살고는 누구 소관이다? 우리 오른편에 있는 누구소관입니까? 주님 소관입니다. 그것 때문에 오른편에 있었어요. 안 그러면 오른편에 있지도 않아요. 오른편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뭔지를 발견하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원수 속에 있으면 원수가 뭔지 몰라요.
오른편에 계신분이 원수인줄 알고 ‘너는 죄악으로 달려가도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십자가 피로 내 죄 용서받았다고 고백하면, 입으로 시인하면 뭘 얻으리라? 네가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 10장 10절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선교단체에서 수백 번 외웠던 그 말씀, 자장밥 하나 먹기 전에 외웠던 그 말씀.
‘성경말씀에 하라고 해서 그대로 하라고 했는데 그것이 뭐가 나쁘냐.’ 이렇게 나와요. 이것은 실을 끊어버린 거예요. 평소의 그 버릇, 나는 뭐해서 밥 먹고 살까, 하는 그 버릇이 그만 불쑥 튀어나와 버린 거예요. 1차 2차 3차 전도를 통해서……, 여기에 터어키가 있잖아요. 여기 이 드로아에서 뭘 받았습니까?
환상을 받았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이 대목에서 하나님이 너무 심하다 싶었어요. 환상까지 줄 것 같으면 좀 안 아프게 하고 편하게도 하고 선교하는데 힘들지 않도록 해주면 되는데 환상은 줘놓고 가보면 고생이 기다리고, 그래서 고생을 직사하게 해요. 아예 처음 다메섹에서 주님 만난 뒤에 아나니아를 통해서 ‘이 사람은 복음을 위해서 숱한 고난을 받아야 돼.’ 라는 것이 시나리오였어요.
시나리오에 보면 (웃으면서 이야기한다) ‘가지마세요.’ 하듯이 이 사람은 많은 환난을 받아야 된다, 라는 이 시나리오가 창세전에 이미 작정 다 되어 있어요. 그 시나리오에 맞춰서 사도바울을 태어나게 했고 살도록 하신 겁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이 이해하게 되지요. 이해하기 때문에 사도바울의 소원은 뭐였습니까? 빨리 이 땅에서의 생을 끝장내는 겁니다.
시나리오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는 모르겠는데 ‘빨리 끝장내고 나도 좀 쉬자.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소원이다. 하지만 너희들 남아 있는 사람들 때문에 주께서 나에게 일을 시킨다.’고 이야기합니다. 1차, 2차, 3차로 전도하고 난 뒤에 로마로 가서 복음전하고 잘 했어요.
인기 좋았는데 5년 동안 투옥되고 그 다음부터는 투옥되고 투옥되면서 옥중서신이라 해서 빌레몬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에베소서를 쓰고 그 다음에 데살로니가전후서를 쓰고 그 다음에 죽기 전에 디모데전후서를 쓰고 목이 잘려서 죽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땅의 입장에서 보면 참 안된 사람이지요. 평소에 결혼 한 번 한 적이 있습니까, 애가 하나 있습니까, 자기 교회가 하나 있습니까?
천막기술 배워서 고린도천막협동조합회장을 지내본 적이 있습니까? 세상 적으로 그야말로 쓰레기도 이런 쓰레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본인이 그것을 자인해요. ‘나는 어디를 가도 쓰레기로서 이동하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을 절대로 여러분들은 흉내 내면 안돼요. 애들은 가라! 이것을 흉내 내면 안돼요. 절대 안 됩니다.
젊을 때 선교한다고 돌아다니면 안돼요. 큰일 납니다. 괜히 헛바람입니다. 신바람은 황수관이지만 이것은 헛바람인거예요. 선교한다는 이런 일에 말려들면 안돼요. ‘그러면 목사님, 나의 시나리오는 뭡니까?’ 즐겁게 들으시기 바랍니다. 본인 시나리오는 전도서에 나옵니다. ‘더 착하지도 말고 악하지도 말고 책도 많이 짓는 것도 피곤하고 책 읽어도 소용없고 포도주 마시면서 아내와 함께 실컷 즐겨라.’ 그것이 딩동댕!
왜냐하면 ‘이빨 날라 가기 전에 귀가 안 들리기 전에 눈에 녹내장 와서 희미하게 되기 전에 실컷 즐겨라. 왜, 어차피 인생은 헛것이니까!’ 인생은 헛것 아닙니까. ‘헛되고 헛되니까 네 원대로 살아라.’ 그것을 네 자로 하면 ‘막 사세요.’ 또 나오네, 또 나와. 즐겁게 막 사세요. 어차피 인생은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죄니까.
또 이 대목만 잘라요. 십분 쉬기 전에 했던 이 마지막 대목 ‘막사세요.’라고 한 이것만 잘라서 ……. 항상 주님의 말씀자체가 우리의 행함에 어떤 의미를 두지 않는 이유는 바로 십자가 때문입니다. 십자가로 이미 규정된 거예요. 무슨 짓을 하든, 테레사 수녀 아니라 별별 것이 되어도 이미 그 자체로 죄에요. 이미 결정되었기 때문에. 구원은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 겁니다. 점심 먹고 합시다. 디모데전후서 제5강
교재7페이지를 봅시다. 3번에서〔디모데 전서 1:15에서 죄인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그리고 디모데후서 1:9에서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라는 말이 나온다.〕그런데 디모데전서를 보면 좀 이상한 것이, 편지를 보낼 때는 교회한테 보내지 사람한테 보내지 않거든요. 그런데 편지를 디모데에게 보낸다고 하는데 디모데가 교회 대표자도 아니고 교회 목회하는 것도 아닌데 왜 편지를 개인에게 보냅니까?
개인에게 보내면 사적인 편지밖에 안되거든요. 그런데 사도의 이 편지가 계시라면 계시는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데 디모데 개인에게 편지를 하면 디모데 혼자 천당 가라는 말인가, 그러면 다른 교인들은 뭐냐, 이렇게 되겠지요. 거기에 대한 해답, 고린도전서 4장 17절에 보면 방금 제가 거론한 문제점의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그 해답이 뭐냐, 4장 17절에 보면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디모데가 사도바울에게 속한 인물이냐, 아니면 그가 예수님께 속한 인물이냐를 우리가 판정을 해야 돼요.
여기 보면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노니.”라고 하고 또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은 쉽게 풀이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 사도바울은 역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디모데에게 편지하는데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아,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받거든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것으로 여기고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살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 디모데, 교회, 이것은 역사에 속한 눈에 보이는 존재들이죠.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할 때 그리스도는 역사에 속합니까, 묵시에 속합니까? 묵시에 속하지요. 그러면 역사는 어디의 지배를 받는다? 여전히 묵시안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어요. 묵시안의 지배를 받아야 비로소 인간들은 자기가 죽은 것을 알고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경우에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예요.
아까 산책을 하는데 최 종훈 장로님이 저에게 요청을 했어요. ‘성령의 삶, 예수 믿고 성령 받은 사람들의 역할, 이런 것에 대해서 상세하게 이야기 해 달라.’고 했는데 성령 받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한 것은 ‘인간으로 불가능한 일을 시키신다.’ 이겁니다. 인간으로 해 낼 수 없는 불가능이 계속 나오는 역할이 성령 받은 사람의 역할이에요.
사람으로 할 수 없는 것, 사람으로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성도가 성령 받게 되면 뭐라고 외치느냐하면, ‘나는 못했습니다. 나는 못합니다.’가 계속 반복해서 나오는 거예요. 이것이 반복해서 나온다는 것은 역사적 존재에 불과한, 역사적 존재에 속한 디모데나 사도바울이나 또는 교회, 역사적 존재에 속한 ‘나는 못합니다.’를 가지고서 이미 이루어진 모든 공로가 묵시적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가도록 하기 위한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이렇게 성령께서 역사하는 거예요.
문장이 참 길죠. 문장이 긴데요, 이것을 끊어서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못하는 일,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맡깁니다. 못하는 일을 맡김으로 말미암아 인간으로서는 흉내도 안 되는, 인간으로서는 할 수도 없는 일이 감히 부족한 종을 통해서 터져 나오는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되어 있어요. 쉽게 말해서 이 땅에 나만 살아 있는 게 아닙니다.
주님도 함께 살아 있는데 나는 주님의 사람 살리는 일 절대로 못하는데……, 사도바울이 앞치마나 손수건 가지고 뭔가 해 내는 일이 에베소 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이렇게 뭔가 해내거든 ‘이것은 보이지 않는 주님이 하신 것으로서 주께서 날 가지고 사용했습니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사도행전 3장에서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낫게 할 때 그 앉은뱅이가 낫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당황스러워한 겁니다.
사람들은 ‘이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했다.’ 베드로와 요한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그 사람을 일으켰다. 우리는 그냥 증인이고 목격자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계속 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하나님께서 너희를 이리가운데 보낼 때는 너희 속에 말하는 이는 네가 아니고 네 속의 성령께서 말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해요.
이것은 뭐냐 하면, 다른 말로 하면 ‘나는 그 말을 했는데 이것은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라는 고백이 터져 나오고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왜 네가 해놓고 네가 한 것이 아니라고 하느냐.’라고 물으면 ‘나는 묵시적 존재 앞에서 죄인이다.’라는 고백과 더불어서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되어 있어요. 그렇지 않고 성령의 흉내를 내버리면 노래방에서 ‘어찌 합니까~’라고 노래를 불러놓고서는 ‘누가했습니까?’하면 ‘성령께서 불렀습니다.’ 하면 성령이 임 재범입니까?
반드시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들어가요. 내가 할 수 없는 것, 평생 동안 설거지 한 번도 안하면서 아내가 해주는 밥만 얻어먹고 산 사람이 갑자기 어느 날 남편이 설거지를 했을 때 ‘여보, 당신 돌았어요? 육십 평생 안하던 설거지를 왜 하는지.’ ‘이건 내가 한 것이 아니야. 주께서 하신거야.’라는 고백을 진지하게 하는 거예요. 물론 잘못되면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는 상황, 파마도 하는 희한한 일이 다 벌어질 수도 있겠지요.
성령의 열매는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이 나오는 것, 그 열매를 자신의 열매가 아니고 성령께서 하셨기에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겁니다. 만약에 인간의 것으로 가능하게 되어버리면 그것은 뭘 했든지 육의 열매가 되고 그것은 성령 없다는 티를 팍팍 내게 되어 있지요. 7페이지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본인보고 ‘죄인’이라고 말을 하면, 이는 곧 자신을 죄인으로 알고 있는 훌륭한 ‘의인’이 되어버린다. ‘나는 죄인입니다.’ 할 때 그것은 곧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고 있는 나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자기가 죄인이라고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것을 두고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보고 죄인이라고 단정 짓는 차원이 인간적 입장에서 하는 차원이 아니고 주께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찾아올 때 다음과 같은 말이 수반되어야 되는데 그것이 7페이지 위에서 두 번째 줄에 〔디모데 전서 1:15에서 죄인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그리고 디모데후서 1:9에서〕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다 같이 시작,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사도바울이 구태여 이 말을 왜 자꾸 집어넣습니까? 돌아다니면서 선교나 하고 전도나 해서 사람이 꾀이지 왜 이 말을 합니까? 이 말을 해서 사람 꾀이는데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지금 디모데한테 편지하는 것이요……, 사도바울의 선교경로를 다시 보면 여기가 아시아인데 여기가 다소에서 안디옥, 여기는 에게해이고 바다건너 마케도니아…, 지금도 마케도니아라는 나라가 있지요, 그 다음에 이 밑에 아가야인데 그 아가야에 속한 유명한 도시가 아테네, 고린도, 그 다음 마케도니아에서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이런 도시들이 있지요.
여기에서 바울이 실라하고 2차전도 할 때 환상 받아서 바다건너 마케도니아로 풀쩍 건너가서 유대인들에게 쫓겨 다니면서 전도하게 되었어요. 아까도 이야기했다시피 아테네 전도한 것이 계획 잡아서 간 것이 아니고 여기서 하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유대인들 통해서 막 공격해 들어오니 도망가다 보니까 아테네까지 가게 되었어요.
아테네에 가서 보니 신상이 많으니까 놀래서 ‘아이고, 우상을 이렇게도 섬기는가.’ 하고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상 이런 것들로서가 아니라 십자가로서 구원받을만한 것을 확정했습니다.’라고 하니까 아테네사람들이 마구 놀리면서 비웃었던 거예요. 아테네에서 고린도에 갔다가 여기서 아굴라 브리스길라를 만났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다시 귀환하는데 2차전도할 때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데리고 갑니다. 디모데를 데리고 실라와 더불어 가면서 여기에 의원 누가도 데려가서 같이 활동하고 여기에 디도라는 사람도 있어요. 디도라는 사람은 디모데보다 선배입니다. 디도라는 사람은 율법문제 때문에 예루살렘에 다녀온 소위 베테랑이지요. 그에 비해 디모데는 초짜라고 할 수 있지요.
여기에 디모데나 실라 이런 사람들을 남겨둬요. 바울은 쫓겨서 도망을 다니면서 이들을 남겨서 남겨진 교인들을 돌보게 하는데 돌본다는 말이 뭐냐 하면 사도바울이 전했던 그 계시를 그 기준에 맞추어서 복음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그 절차를 계속해서 검토하고 관찰하는 일을 합니다. 디모데에게 편지한다는 것은 사도바울이 몸은 여기 있으나 마음은 벌써 만케도니아나 이런 지역에 가 있는 거예요.
이것은 2차 전도뿐만 아니라 3차 전도도 마찬가지에요. 3차전도할 때는 굉장히 바빠요. 한 바퀴 더 도는데 돌면서 에베소 갔다가 마케도니아 갔다가 고린도 갔다가 여기서 여러 번 돌아요. 여기를 돌면서 주고받는 편지, 그리고 디모데를 여기 보냈다 또 여기도 보냈다 다시 고린도로 오너라, 합치했다가 자기는 에베소로 빠지고 거기서 ‘고린도는 이상 없나?’ ‘지금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무슨 문제인가?’
3차전도할 때 아볼로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 사람은 좋게 이야기하면 말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고 약간 다르게 이야기하면 좀 나댄다고나 할까 그런 성질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이 사람이 자꾸 고린도 아가야 도시에 가서 자기가 전한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거예요. 아볼로라는 사람은 누구한테 배웠느냐하면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한테 복음을 배웠어요. 당시 사도바울은 안디옥에 있을 때였는데 가라고 했거든요. 고린도지역에 갔는데 이 사람이 좀 나대는 기질이 있었는지 여기서 이 사람이 인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고린도교회에 파벌이 생겼습니다. 제일먼저 나온 파가 놀랍게도 ‘아볼로파’에요. 그 다음에 누가 나왔느냐, ‘바울파’ 그 다음에 베드로가 수제자니까 ‘게바파’ 더 놀라운 것은 이것을 다 통합하는 ‘그리스도파’가 나와서 이 네 분파가 등장했는데 이 네 분파를 잠재우는 방법으로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뭐냐, 아까 제가 고린도전서 4장 읽었잖아요.
사람들이 항상 역사적인 흔적을 통해서 복음을 받으면서 성령을 받아서 묵시로 나아가야 되는데 묵시로 나아가지 못하고 항상 역사에 머물고 마는 거예요. 아볼로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기전까지는 요한의 세례만 이야기했어요. 요한의 세례가 뭐냐, 역사적인 흔적을 이야기하잖아요. 요한의 세례를 이야기할 때 여기서 성령세례를 이야기해버렸어요(행 18:24-28).
성령세례를 이야기하니까 ‘아, 우리가 지금 전도하는 이것이 영역의 확장이 아니구나.’라는 것, 왜 영역확장이 아닐까요? 묵시적 입장에서 영토라 하는 것은 확장되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영역을 많이 차지한다는 것은 나폴레옹이나 좋아할 문제입니다. 땅 자체가 이미 죽음으로 부정당한 상태에서 쓰레기장 많이 확보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부잣집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쓰레기하치장이나 만들어놓은 거지요.
역사적 인식에서 묵시적 인식으로 전환을 해야 되지요. 제가 첫 번째 강의한 것이 기억납니까? 불과 만 하루도 안 되었는데,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여기 십자가와 부활 사이의 갭이 있는데 건너뛰는 것이 뭐밖에 안된다고 했습니까? 성령밖에 안 되는 거예요. 육은 이 십자가에서 ‘그만!’ 여기까지밖에 못 오는 거예요.
모든 육이 여기까지라는 것은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 정리되고 그 다음에 죽어 마땅한 인간 중에 누가 여기서 건너는가 하는 것은 성령의 몫인데 성령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의논된 바를 그대로 여기에 적용시킵니다. 그러면 다 건너올 수가 없고 오직 누구에게만? 아버지에게 택함 받은 자만, 창세전에 예정된 자만 건너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께서는 이 묵시적 사실을 그대로 전도하는 판에 내 구원, 내 영역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는 거지요. 아무리 땅이 넓어도 성령 받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면 그것은 소용이 없는 것이고 아무리 땅이 좁아서 성령 받은 사람이 열 명이 있으면 그것은 북적북적 대면서 바빠요. 특정교회가 그렇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또 시기가 나기 때문에.
이렇게 보면 돼요. 항상 사도바울은 사도바울 밑에 디모데와 디도와 실라를 달고 다닌다고 보면 됩니다. 항상 보고를 받는데 그 보고의 내용이 뭐냐, 묵시가 어떻게 역사를 이겼느냐 하는 그 문제에 대해서 보고를 받습니다. 묵시가 역사를 이기면 ‘아, 믿음 좋구나.’ 하고 역사가 묵시를 밀쳐내면 ‘아이고, 그것은 망했구나.’ 이렇게 보는 거예요.
‘묵시가 역사를 이겼다.’ 하는 말은 뭐냐 하면, 사람은 사람인데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이 나오는 것, 다시 말하면 역사적 존재에서 묵시가 뿜어져 나오는 그것, 항상 그 묵시가 뿜어져 나오는가의 그 보고를 항상 듣는 겁니다. 누가? 사도바울이. 왜냐, 사도바울은 예수 안을 고집하기에 그래요. 예수 안에 있을 때는 예수 안 자체가 역사적으로 확인이 안 되는 거예요. 왜냐, 묵시기 때문에.
하지만 묵시와 역사가 만날 때 거기서 나오는 것은, 역사 속이지만 역사에서는 나올 수 없는 묵시가 파급되고 발산되는 그 소식을 듣고 싶은 겁니다. 괜히 선교지역 많이 넓힌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그런데 여기에 성령께서 도와주셔서 여러 가지 사건을 일으킨다고요. 무슨 말이냐, 역사와 묵시가 만났을 때, 성령과 육이 만났을 때 육은 육대로 자기의 본색을 아주 여과없이 드러냅니다.
그게 뭐냐, 아까 이야기한 파당이 있는 것이고, 교재에도 나와 있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사도바울을 포기하고 돌아갔어요. 많은 사람들이 사도바울의 복음을 거부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갔을 때 사도바울은 그들을 사단으로 돌아갔다고 지적해 버려요. 여기서 생각할 것은 뭐냐, 그 사도바울을 버리고 간 사람들을 다시 한 자리로 주워 모으자는 말이지요.
모아서 하나 하나 인터뷰를 해 보는 거예요. ‘뭣 땜시로, 무엇 때문에, 어떤 소리가 장애가 되어서, 어떤 것이 거부감을 느끼게 했기에 제가 전한 복음에서 나가셔야만 했습니까?’라고 다 한 사람씩 물어보는 거예요. 그 물어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왜냐, 역사 속에서 사단에게 돌아간 사례들을 모을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복음을 듣고도 사단에게 돌아간 사례1, 사례2, 사례3, 이런 것들이 쓸데없는 것이 아니고 다 필요한 거예요.
왜, 그것들을 모아놔야 다른 지역에 복음 전할 때 ‘이러한 사람들이 그러한 속성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니 돌아가실 분들은 일찌감치 돌아들 가시기 바랍니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예요. 이것은 이사야가 복음 전할 때의 원칙과 똑같습니다.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한다.’ 이것은 사도행전 마지막에 또 나와요.
예수님도 요한복음 12장에서 하신 이야기고 사도행전 28장 마지막에 또 나오는 대목입니다.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한다.’는 그 원칙을 준수해 줘야 계속해서 묵시와 역사가 혼합이 안 되고 묵시는 묵시대로 역사 속에서 또렷하게 빛을 발하는 거예요. 그럴 때 그것은 바로 ‘예수 안’이라는 위력이 결국은 마지막 심판 이전에 이미 심판이 개시되었다는 이 종말론적 현상을 충분히 반영해 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에게 다 물어봤을 때 그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이었는가, 궁금하지요? 그것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나 모든 성경구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을 배반하고 도망갈 때 그 현상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편지 속에 다 심어놓은 거예요. 그들이 사단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행함’이었습니다. 놀랍게도 ‘행함’이었어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사도바울의 권면과 명령과 지시가 굉장히 많았잖아요. 다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 그러지 않잖아요. ~하라, 하는 것이 많잖아요. 그 많은 명령과 지시를 했을 때 그들이 행함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이 결국은 사단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거예요. 어떤 명령이 왔을 때 행함으로 마중 나올 수밖에 없는 사람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이 해 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께서 명령하고 지시를 내릴 때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을 내세운다면 결국 그 사람은 사단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지시와 명령이 왔을 때 인간이 해내지 못하는 고백이 터져 나올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지시와 명령을 내린 본래의 묵시의 효과를 지금 보고 있는 거예요. 행함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하셔서 그 결과로 우리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하는 엉뚱한 고백이 튀어나와야 돼요.
행하라, 하면 행하면 되는데, 행함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었습니다.’ 하는 십자가의고백으로 튀어나올 때 이 사람은 지금 이 사도바울의 명령과 지시를 그냥 역사적 존재로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이라는 묵시 안에서 지시와 명령을 받고 있으니 사도바울도 예수 안에서, 그것을 중간에 전하는 디모데도 예수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받는 진짜 교인들도 예수 안에서, 이래서 우리는 모두 다 예수 안에서 한 몸이 되고 한 영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하니 또 갑자기 박 ○○씨가 그리워지네요. 이번에 참석한다 했는데 사정이 있어서 못 온 모양입니다. 이런 예수안의 묵시적 모습들이 사단으로 돌아가는 그러한 현상들을 유발시키면서 묵시적 현상이 오는 거예요. 들판 산길에서 오토바이 난폭하게 몰아보세요. ‘빠라바빠라밤’ 하면서 몰아보세요.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지요. 묵시가 지나간 곳에 역사의 먼지가 온통 일어나지요.
그 먼지 하나하나를 버리지 말고 다 주워 모으면 그 먼지가 뭡니까? ‘우리는 행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 성령의 열매는 뭡니까? ‘이것은 도저히 나에게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안경이 여기 있다 합시다. 다른데 신경 쓰다가 안경을 떨어뜨렸어요. 떨어뜨리니까 ‘아이고, 목사님! 안경을 떨어뜨렸습니다.’ ‘아이쿠, 내가 왜 그랬지?’ 이것은 자기도 모르게 다른 생각을 하다가 떨어뜨린 거예요. 이것은 자기의지가 없어요. 주께서 하신 겁니다.
그 다음에 아까 그 사람이 왔어요. 관심을 끌기 위해서 살짝 안경을 떨어뜨렸어요. 이것은 누가 한 겁니까? 내가 한 거지요. 한 번 했다 그거거든요. 그러니까 성경을 자주 보면 볼수록 점점 묵시는 날라 가 버리고 뭐만 남아요? 성경말씀이 역사적으로 해 낼 수 있는 문장들로 이해가 되는 거예요. 이것은 해 낼 수 있다는 거예요.
그 앞에 무슨 말을 붙이느냐하면, ‘성령의 힘으로, 은혜로.’ 이런 말들을 갖다 붙이면서 해 낼 수 있다는 거예요. 갑자기 행할 수 없는 사람이 뭐로 바뀌었습니까? 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니까 그 다음부터는 사도바울이 복음 전하면 뭐라고 합니까? ‘안다.’ 그렇게 해요. 다 안다는 것은 더 이상 사도바울에게 머물 수 없고 나는 어디로 가겠다? 본래의 내 자리로 돌아가겠다, 그 말 아닙니까?
그러면 사도바울의 자리는 계속해서 무슨 자리입니까? 예수 안이라는 자리지요. 어떤 자리라고 했습니까? 날마다 나를 죽이고 내 안에 누가 사는 자리?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있는 자리가 예수 안의 자리인데 사도바울보고 ‘나는 다 안다. 나는 많이 들었다. 나는 내 자리로 돌아간다.’ 하면 자기가 돌아간 자리는 무슨 자리입니까?
사도바울이 경험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안이 아닌 다른 자리로 가지요. 예수 안 말고 다른 자리를 무슨 자리라고 합니까? ‘예수 밖’이죠. 참으로 간단한 것, 이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예수 안이 아니고 예수 밖이죠. 예수 밖은 누가 지배해요? 사단 지배하는 거예요. 그러니 사단으로 그렇게 돌아간 거예요.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요구하듯이 말씀을 준다는 것이 그것이 부담이 되신다면 처음에 했던 그것도 사실은 주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했는데 가만 보면 사실ㅇ은 본인이 엉겁결에 한 거예요. 본인이 했기 때문에 그 다음에 또 하라고 하면 자기가 한 것을 꾸며서 되풀이 하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할 때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은혜스러워서 눈물을 팍 흘리면서 ‘맞아, 내가 돈을 사랑했구나.’ 했다 이 말이지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그 말에 너무 감격해서 ‘이제는 돈을 사랑하지 않겠습니다.’가 아니라 그 묵시적 해답은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그렇게 돼야 돼요.
예수님께서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라고 베드로보고 이야기하니까 베드로가 뭐라고 했습니까? ‘야, 오른 편에 던지니 대~박!’ 이랬습니까? 아니지요.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저 같은 인간은 상대할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나올 때 제대로 이해 된 거잖아요. 그런데 그 ‘배 오른편에 던지라.’하는 그 문장을 가지고 오른편에 던졌다, 오른편에 또 던지고, 참 재미있네, 또 던지고.
로또를 샀는데 생각지도 않게 5등짜리가 되었다. 진짜 묵시적으로 느낀다면 그 다음에 뭡니까? ‘주여, 로또 사는 것 괜히 샀습니다. 괜히 이런 것 사서 주님을 시험하는 기회가 되어버렸으니까 이런 것 사서 한몫 보겠다는 이 자체가 죄인 줄 이제 알았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라고 한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로또 샀는데 대박 났다, ‘주의 은혜입니다. 한 번 더 사소서. 형제여!’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한 번 더 사서 기도를 빡세게 하게 되면 전에는 5등 했는데 이번에는 2등으로 올라갈 수 있지 않겠냐고 나올 수 있는 것이 뭐냐, 그 사람은 첫 번, 두 번, 세 번도 다 뭔가 신비로운 것을 내 손으로 해 낼 수 있다, 가 돼 버려요.
내가 해 낼 수 있으면 그 다음부터 나는 내 안에 살지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은 따로 떨어져 나가버리는 거예요. 주님이 아니라도 내가 할 수 있는데 내가 뭐 때문에 귀찮게 시어머니하고 같이 사느냐 그 말이지요. 그럴 필요가 없겠지요. 제가 그 설교를 오전에 했는가, 잡채 이야기를 언제 했습니까? 시어머니 잡채 이야기, 오전입니까? 기억 안 나세요? 그것도 세월 지났다고.
시어머니가 시골서 와서 며느리보고 살림 못한다고 했는데 한 5년 지나서 자기도 잡채를 할 수 있다고 잡채를 하니까 시어머니가 ‘이것도 잡채라고, 이게 내가 원하는 그 맛이야?’ 하고 며느리 면상에다 잡채를 던져버렸답니다. 교회 한 십년 다녔다고 ‘주여, 나도 내가 알아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면 ‘이것도 기도야, 지금 네 기도하고 예수님 기도하고 같다고 보나?’ 하고 던져버려요.
그러면 그것이 뭐냐, 어느새 우리는 묵시의 그것을 나를 긍정하기 위한, 내 역사적 존재를 인정하기 위해서 이미 변질된 채 우리 안에 와 버리죠. 그러면 성령의 열매는 끝이 나고 그 다음은 육의 열매가 시작되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말도 여러 번 해버리면 그것이 묵시가 아니고 역사의 되풀이가 되버려요.
하나의 종교적인 기술이 된다니까요.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 자주해도 이것은 실없어. 가끔 타이밍 맞춰서 해야 되는데 시도 때도 없이 해버리면 이것은 장난도 아니고, 그렇게 돼버리는 거예요. 선물도 너무 줘버리면 나중에 그것은 일상이 돼버립니다. 주의해야 됩니다, 남편들. 십년씩 아무것도 안하던 사람이 줘야 감격이 되지요. 그게 욕망 체감의 법칙이라는 겁니다.
디모데전서 1장 9절에 봅시다.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 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 이렇게 죽 항목들이 나와 있습니다.
에베소에서 변론이 생깁니다. 왜 변론이 생겼는지 이야기해 드렸지요? 항상 묵시가 역사를 만나게 되면 역사는 가만있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역사는 자기위주로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수고롭게 했던 법적조항들을 가지고 맞서 싸우게 되는 겁니다. 맞서 싸우게 되면 묵시는 행함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의롭게 된다는 그것하고 맞딱뜨리게 되지요.
그러면 이쪽에서는 ‘왜 행함으로 의인이 될 수 없는가? 왜 우리의 행함을 무시하고 모독하는가?’하고 싸움이 붙지요. 이 시합은 이미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하고 붙었던 그 시합을 성령께서 그대로 가져다가 이제는 누구에게 주어지게 한다? 사도바울에게 주어지고,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예수님이 여전히 부활해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지상에서 했던 일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주어지고, 주어지고, 주어지는 거예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복사판이에요. 우리 인생자체가 예수님의 복사판입니다. 똑같이 물위를 다 걷는다는 뜻이 아니고 똑같이 우리는 믿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아니면 구원 못 받는다는 점에서 우리는 예수 안에서 복사판이 될 수밖에 없어요.
국화빵 찍어내듯이 계속해서 찍어내는 거예요. 오직 믿음으로 구원, 피로 구원, 계속 찍어내고, 사단은 행함으로 구원받자는 식으로 계속해서 갈 수밖에 없고, 그것을 계속 반복하는데 상황 따라서 형편 따라서 갖가지 현상들이 일어나는데 축약을 해보면 그것으로 매듭이 지어져요. 그렇다면 율법의 행함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선물로 받아들임으로 구원받는다는 여기에 대해서 율법무용론, 율법이 필요 없지 아니 하냐, 라고 나오는 거예요.
율법이 필요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역사적 존재에서 인간들은 천국이라든지 하나님 계신 곳에 가기 위해서 어딜 가도 항상 유대인들이 설친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하나 짚고 가고 싶은 것은 유대인들 가운데 간 사람도 많지만 헬라인들 가운데도 간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두가지 다를 알아야 돼요. 사단에게 돌아가도 종류가 달라요.
유대인으로 간사람, 헬라인으로 간사람, 종류가 다 달라요. 여기서 인간이 율법 행함을 통해서 하나님께 간다고 할 때 율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고 누가 율법을 쥐고자 합니까? 내가 율법을 쥐고자 할 때 여기서 뭐가 발생되느냐, 율법에 대한 행함이 나오지요. 이럴 때 율법은 죽어 있는 무생물이 되지요. 죽어 있는 무생물을 가지고 고린도후서 3장에서 ‘문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율법을 무생물로 보지 않고 뭐로 봅니까? 마치 꿈틀거리는 생명체로 보지요. 생명체로 보게 되면 율법이 누구를 지배해요. 우리가 율법을 지배하려고 손 내미는 그 이전에 먼저 율법이 뭘 지배합니까? 율법이 우리를 지배하게 돼요. 율법의 지배를 받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어떤 현상이 벌어집니까?
율법이 우리의 주체에 압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주체의 수축현상, 다른 말로 하면 응축현상이 벌어집니다. 주체가 응축되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 도망치기 쉬운 거예요. 법의 화살이 퓽, 퓽 날아오면 이것이 작기 때문에 싹, 하고 피할 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형하고 동생하고, 여기서 형과 동생의 차이점이 뭡니까?
같이 부모에게 잔소리를 들어도 형은 경험상 응축되어 있기 때문에 매끄럽게 피할 수가 있는데 어리한 동생은 부모 잔소리를 혼자 다 맞아요. 당나라 장수도 아닌 것이 오는 화살을 혼자 다 맞아요. 다 맞고 엉엉 울고 있고 형은 ‘어머니, 잘못했어요. 어깨 주물러 드릴까요?’ 하면서 뺀질이로 자기 주체를 살리면서 화살은 다 피하는 겁니다.
동생은 그것도 모르고 ‘내가 뭘 잘못했다고, 엉엉!’ 울고 있지요. 그러면 ‘어이구, 미련 곰탱이 같은 것…….’ 주체가 뺀질뺀질 하지를 않아요. 수축이 되면 간편하게 갖고 도망을 치는 겁니다. 주체가 수축이 되면서 그 안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시원적인 휴식이 여기서 가능해요. 하나님이 주신 휴식, 하나님이 주신 휴식이라는 것은 뭐냐, ‘나는 나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방치한 상태, 하나님에게 관심 없고 하나님에게 영광 돌리지 않더라도 내가 현재 갖고 있는 내 것으로만 편안하게 ‘세상 참 살기 좋다’ 하고 편히 쉴 수 있는 휴식을 주체가 있을 경우에만 보장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뭐가 접근하느냐, 강력한 혜성 같은 것이 접근해 버려요. 강력하게 접근해 버리면 주체는 도망치기 바쁩니다. 어디로 도망치느냐, 이 주체가 깨어지지 않는 방법으로 여러 가지 손쉬운 법들을 가지고 그것을 지키면서 큰 덩어리로 오는 법들에 대해서는 낯을 피해버립니다. 오늘 강의를 왜들 이렇게 잘 듣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들 자기들 이야기로 듣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제가 지금 오해를 했는지…….
성경말씀가운데서 큰 덩어리로 다가오는 것은 피하면서 내가 쉽게 할 수 있는 것,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 그런 것들을 지키면서 큰 덩치의 말씀에 대해서는 쉭, 쉭, 하면서 피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서 계속해서 응축된 주체, 콤팩트한 주체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거예요. 나중에는 이 주체가 이것이 변비, 꽉 막힌 똥, 너무 딱딱해서 자기도 감당을 못해요.
미치겠지요. 이놈의 주체가 내가 나에게 우상이 되어버렸어요. 여기에 하나님께서 준비한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율법이 올 때 율법이 문자로서만 오는 것이 아니고 율법의 문자, 무생물을 생물로 전환하는 방법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체에게 주어진 환경을 이용합니다. 여기에 새로운 사태가 벌어지게 하지요. 사태가 벌이지면 좋게, 좋게 지내다가 도저히 못 참으면 이 응축된 본성으로 가는데, 이 응축된 본성이 뭘 갖고 있느냐, 태고적 혹은 시원적 휴식, 안식 또는 평화, 이런 것들입니다.
말이 어려우니 쉬운 말로 합시다. 아우슈비츠에서 유태인 500만을 학살한 나치전범인데 전쟁이 끝나고서 남미에 숨어서 한적하게 낚시를 즐기고 있다가 붙잡힌 사람이 있어요. 유태인 학살의 주범을 잡으러 다니는 유태인들의 조직이 생겨났어요. 낚시의 표상이 뭡니까? 휴식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평화지요.
안식 같은 것, 내면의 청정, 낚시를 하는 이유가 고기를 낚기 위함이 아니라 시간을 낚기 위함이라고 낚시꾼들이 그런 소리들 많이 합니다만 보통 낚시 갈 때는 집구석에 문제 있을 때 모든 문제를 마누라에게 다 맡기고 자기혼자 도망칠 때 낚시를 하러 가는 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평화, 안식, 휴식, 이것이 뭐냐, 태고 적인, 시원적인 휴식을 안 빼앗기기 위해서 최후의 마지노선을 형성하는 거예요.
이것 깨지면 왜 안 되는가, 이것이 깨지게 되면 그동안 이것을 응축하기 위해서 수고한 모든 것이 헛짓이 되기 때문에 다른데서 나를 찾을 수가 없어요. 이미 그리스도밖에는 나와 버렸고 그리스도밖에 나왔으니까 이제 시원적 휴식, 안식은 내 것으로만 응축될 때 그 안에서만 육신은 즐기는데 만약 그것마저 공격받아버리면 나는 ‘누가 나를 위로해 주지? 누가! 누가 나를 위로해주나? 여러분? 윤 복희?’ 누가 나를 위로해 줘요?
여기서 나오는 것이 자기에 대한 지독한 동정이고 자기가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거예요. ‘주여, 나같이 불쌍한 놈이 어디 있다고 저를 건드리십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하여튼 적반하장도 이런 것이 없어요. 자기가 그렇게 불쌍하대요.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네가 누구하고 비교했는데 네가 불쌍해?’ ‘과거에 생각했던 나의 야심에 비해서 지금은 너무 초라한 결과입니다.’ ‘과거의 환상이라, 누가 너보고 그런 환상을 가지라고 했지? 제가 가져습니다.’ ‘네가 그랬다고? 그러면 네가 잘못되었네. 네가 처음부터 죄인이라 여겼으면 아무 문제없는 것을 가지고 네가 잘난 척을 하려하니 네 지금의 꼬라지와 과거를 비교하면 안 되지.’
젊을 때 공주 아닌 여자가 누가 있고 왕자가 아닌 남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괜히 동화책을 많이 봐서 어디서 괜찮은 왕자가 와서 자기한테 뽀뽀해주고 결혼해주기를 원하는 공주, 그런 공주를 원하거든 독 사과를 먹든지 아니면 계모를 만나든지, 일곱 난장이와 사귀든지, 그런 것이 있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신데렐라, 일부러 신발 한 짝 벗어놓고 도망치고, 미팅 가서 그런 짓 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너무 많이 봤어, 동화를! 동화 보여주는 그것도 죄악이라, 행함이에요. 애들이 그런 것을 보여주면 괜히 꿈을 꾼다니까요. 갑자기 엄마한테 와서 ‘엄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려줘.’ 이따위 소리나 하고 있어요. 뭘 본 것은 있어가지고 만약 친 엄마 같으면 이런 구박은 있을 수 없다고 오해를 해서 신뢰성이 깨져서 미국으로 가서 양부모한테 가고……, 이런 이야기들이 방송에 나오는데 보니까 돌았어요.
그 돌았다는 말이 뭐냐, 사실은 주체가 응축되어 있다, 자기가 자기를 깰 수 없는 정도로 응축되었어요. 그 주체가 완전히 응축되어서 그 응축된 자기 안에 자기를 집어넣으려하니 자기가 얼마나 왜소해집니까? 왜소해지고 폐쇄되고 자폐증처럼 자꾸 기어들어가는 거예요. 기어들어가니까 주께서는 사태를 일으킵니다. 어떤 사태? 말씀의 본뜻이 응축된 주체인 네가 이해하는 그 말씀이 그 말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아니고 이 모든 율법의 말씀 앞에서는 율법의 완성이 죽음이에요, 피입니다. 응축된 주체는 뭐냐 하면, 말씀을 지키면 복 받아서 떼 부자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말씀의 성취는 뭐냐 하면, 대신 죽음이에요. 십자가죽음이라니까, 그것이 율법의 완성이에요. 십자가 말씀을 가지고 십자가사태를 일으켜버립니다.
그러면 여기서 본색이 드러나지요.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이러면 사울 같은 사람은 깨진 겁니다. 그러면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거예요. 죄인인줄 안다고 할 때 응축된 주체가 아는 죄인은 시원의 휴식을 깨지 않기 위해서, 무슨 말이냐 하면……, 이왕 어려운 것이니 어렵게 합시다.
응축된 주체에서는 뭐가 나오느냐하면, 가능성이 나와요. 가능성이란 자유입니다. 그런데 자유를 자기가 다뤄보니까 이 자유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고 그 자유는 유한한 자유에요. 이것을 가지고 ‘현기증 나는 자유’라고 합니다. 꿈은 너무 많고 하고 싶은 것이 많은데 다 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현기증, 또는 저 높은 곳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나지요, 그 현기증이 나는 이유는 그 높이만큼 자기가 채울 수 있는 능력이 못되는 거예요.
새 같으면 현기증이 납니까? 독수리가 날다가 ‘아, 어지러워.’ 합니까? 높이, 높이 날아도 그 높이를 다 감당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인간이 절망하면서 현기증이 나는 이유는 그 높이만큼 떨어져도 응축된 주체가 안 깨진다는 보장이 안 되는 거예요. 문제는 응축된 주체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가 뛰어내릴 자유는 있지만 ‘나중에 낙하산 타고……’ 이렇게 미뤄버리는 겁니다.
자유는 하되 그 자유의 목적이 뭐냐 하면, 내가 나를 유지하고 보존하는데 사용되는 자유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보니까 도저히 내가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그것보다 더 심한 자유는 뭐냐 하면,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나무를 뽑아라.’ 할 때 나무를 뽑는 것은 자유지요.
나무를 뽑아놓으면 뭐합니까? 바다에 심어야 되는데. 산을 들었다 치더라도 이것을 바다까지 옮기는데 너무 힘이 들어요. 산을 옮기지를 못해요. 더욱더 나의 왜소함을 자극하니까 그런 것은 치워버리는 겁니다. 그런 것은 치워버리고 온유와 화평을 해가지고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것을 대체하려고 시도하면서 응축된 주체를 갖고 있는 시원적 휴식과 평화와 안식은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심보를 발휘하게 되는 거예요.
골라잡아서 지키고 골라잡아서 믿는다, 그 말입니다. 지하철에 엎드려 있는 노숙자한테 천 원 줄 수는 있어요. 하지만 요한1서 3장 16절에 나오는 ‘형제를 위해서 내 목숨을 바치라’는 것은……, 간은 떼 줄 수 있어요. 자기 아는 친척이라든지 누군가에게 떼 줄 수 있지만 목숨을 바치는 것은 못하는 거예요. 요한일서 3장 16절에 ‘사랑을 알면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당연하다’ 또는 ‘마땅하다.’고 하지요.
그런 커다란 덩어리 같은 율법은 우리는 피하고 싶은 겁니다. 왜? 현기증 나니까. 내가 갖고 있는 이 평화, 내가 내 안에서 만족하는 이 평화를 더 이상 다치기 싫은 거예요. 다치면 아파~! 트라우마지요, 정신적인 상처가 아파요. 아프면 사는 것이 힘들어요. 따라서 욕심내지 않기로 작정하고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면서도 내 안에서 평화는 유지되어야 되겠고, 그런 것들이 어떤 새로운 사태를 발견하면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밀치는 작업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항목들이 디모데전서 1장 9절에 나오는 항목들이에요. 도둑질하는 것이 하고 싶어서 합니까? 남들처럼 살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사기도 마찬가지죠. 사기 치는 것이 재미가 아닙니다.
남들이 타고 다니는 차를 자기도 타고 싶은데 고물차라도 사려면 사기를 쳐서라도 돈이 있어야 되고, 젊은 애들이 남들 나이트클럽 가서 술 먹고 놀면서 남녀 간에 미팅을 하는데 남들은 있어 보이니 미팅도 잘되는데 자기는 돈 없으니 허름하게 보여서 그것도 안 되니까 거기에 열 받아서 ‘나도 언젠가 한 번 사기라도 쳐서 돈 좀 뿌려봤으면 좋겠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환경들을 조성해서 사기나 탐욕이 나올 수밖에 없게 하는 거예요.
제발 네 분수와 주제를 좀 알아라, 그 말이지요. 그 아는 기간을 십분 드리겠습니다. 디모데전후서 제6강
율법에서 율법이 필요치 않은 그런 의인은 없습니다. 의인 따로 있고 죄인 따로 있어서 죄인들만 율법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 사태가 일어나면 자기가 율법이 필요 없고 자기가 의인이라고 우겨도 여기 이 항목들에 해당되는 것들이 툭툭 튀어나오지요. 원래 예수님 자체가 묵시적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까이 접근하면 우리 주체는 감당이 안돼요.
감당이 안 되고 그냥 사도바울이 한 것처럼 놀라서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할 때 고마운 줄 알면 돼요. ‘주여 제가 주제넘게 환상과 꿈을 꾸었습니다. 제가 잘못되었습니다. 제가 죄인 맞군요.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이러면 된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나는 잘못한 것 없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주께서 뭐라고 합니까? ‘네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내가 피를 왜 흘려야 되지?’ 그러면 하는 말이 ‘누가 주님보고 피 흘리라고 했습니까? 왜 본인이 피 흘려놓고 나한테 책임을 묻습니까?’하지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오, 그래 너 잘났다.’ 사도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난 뒤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떠난 사람들은 자기 것을 포기 못 하겠다 하는 거예요.
자기 자존심이나 가치나 의를 포기 못하겠다는 거예요. 여기서 하나 주의해야 될 것은 이겁니다. 사도바울은 움직이는 계시가 되기 때문에 자기를 떠난 사람은 사단에 속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를 떠난 사람은 사단에 속했습니까, 안 속했습니까? 그것은 제가 계시의 중심에 서 있느냐, 아니냐의 그 문제 아닙니까? 저는 아니지요.
우리 자신을 떠났다고 사단에게 돌아갔다고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왜냐,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밖에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사도바울당시에는 성경이 형성과정에 있어요. 방언이라는 것은 불신자를 위해서 있는 것이고 예언과 통역은 신자를 위해서 있는 겁니다. 이것이 두 개가 합쳐지면 말씀의 완성이 돼요. 지금은 말씀이 완성되었기에 방언이고 예언통역이고 따로 분류가 안 됩니다만 그 당시는 말씀의 형성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방언을 하는 것은 불신자들에게 신비적 묵시적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방언을 했던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 이해 못하지 롱?’라고 하고 예언과 통역은 이것을 수용하는 사람 ‘야, 주님의 계시인데 그 뜻을 모르겠다.’ 이렇게 주님의 계시의 뜻을 모를 때 통역의 은사가 제공되는 겁니다. 이게 전부 다 능력자에요. 하지만 방언과 예언과 통역을 주도하는 분이 있습니다. 제일 첫 번째가 사도가 되고 그 다음에 예언자요 그 다음에 교사가 되고 그 다음에 능력행하는 자, 그렇게 되어 있지요.
사도나 예언자 교사 능력행하는 자, 할 때 여전히 사도가 뭘 갖고 있습니까? 계시의 범위를 고정시키는 중심축으로서 사도가 살아있던 그 때 그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가 죽었잖아요. 사도가 죽어버리면 그 계시가 지금 어디 있느냐가 문제지요. 그럼 우리가 알다시피 사도가 죽은 것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사도를 사용해서 성경의 완료성으로서 그렇게 했고 사도가 죽고 난 뒤에는 사도가 죽어도 성령께서 살아계십니다.
성령께서 완료된 성경책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말씀이 무생물이 아니고 생명체임을 알려주는 방식으로 한 거예요. 그렇게 되면 디모데전후서 모든 강의가 ……, 어떤 분은 말하기를 아직도 1장도 안 들어갔다는 거예요. 강의 몇 시간 남지도 않았는데. 디모데전후서 빠르면 한 시간, 더 걸리면 한 시간 반 만에 다 끝납니다. 다 끝나는데 왜 그렇게 할 수 있느냐하면, 디모데 전 후서를 따로 따로 설명해버리면 나중에 응축된 주체에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셈이 돼요.
‘성경에 이런 것이 있다.’ ‘그것 안다.’ ‘2장에 이런 것이 있다.’ ‘그것도 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것은 성경 본래의 사도중심축으로 전환되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고 마는 겁니다. 만약에 그 당시 사도에게 이 말씀을 들은 사람은 그들로 하여금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구원되는구나.’ 하고 그리스도 안, 십자가중심으로 모아졌는데 성경읽기 식으로 해 버리면 사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가는 것이 아니고, 또는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고 그냥 ‘내가 이것을 안다.’는 지식으로 머물러서 나를 응축하는데 보탬이 되는 성경지식정도로 머물 수밖에 없는 겁니다.
따라서 이런 지식들이 있더라도 그것이 지식이 아니고 어떻게 지금 현재 살아있는 현실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 뒷배경의 모든 사실들을 길게 설명한다는 것을 양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디모데전서 1장 12절, 13절을 봅시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 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했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자기가 예수를 안 믿은 것은 자기 책임이다, 책임이 아니다? 자기책임 아니지요. 왜 본인이 알고 안 믿은 것이 아니고 몰랐기 때문에 안 믿은 거지요. 그러면 자기책임이 아닌 거예요. 우리도 이것을 이야기해야 됩니다. ‘전에 내가 예수 안 믿은 것은 내가 몰랐기 때문입니다.’라고 이야기해야 돼요.
그것만 이야기하지 말고 그 앞에 것도 해야 돼요. ‘내가 전에는 예수님을 핍박했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해야 돼요. 그런데 ‘나는 예수님을 핍박했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것은 빼놓고 ‘내가 뭐 알아야 믿지 몰랐는데 뭐.’ 이것만 달랑 이야기해버리면 자기가 잘난 사람이 돼버려요. 자기가 마땅히 지옥 갈 자인데 주님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생각이 안 들고 ‘나는 몰랐기 때문에 지옥에 간다는 것은 나에게는 너무나 어불성설이고 잘못된 조치입니다.’ 이렇게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지요.
지식에서 지식으로 머물면 안 되지요.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을 몰랐는데 예수님을 알고부터는 소급해서 몰랐던 시절까지의 내 상태를 마치 파도가 덮치듯이 한꺼번에 다 덮친 거예요. 수해 났어요. 원래 물은 하수구로만 빠지게 되어 있는데 수해가 나서 부엌 안방까지 다 차버렸어요. 이 넘치는 수해, 물의 넘침 그것이 바로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은혜, 용서라는 거예요. 그리고 앞으로 남아 인생까지 은혜라는 물이, 긍휼이라는 물이 가득차 있습니다.
이 상태를 아니까 우리는 즐겨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는 말을 하는데 그 말을 하면서 입가에 웃음이 늘어졌어요. 웃음이 늘어지면서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야기할 수 있다 이 말이지요. 그것을 좋다고 이야기하면 성도고 그것을 찡그리면서 이야기하면 성도가 아닌 거예요. 틱틱거리면서, 또는 씩씩거리면서 ‘그래, 죄인 중에 괴수 맞다.’ 하면 아주 수상하고 사단으로 돌아갈 사람이에요.
사단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주 쉽게 돌아가요. 사단은 항상 옆에 붙어 다니니까. 14절을 봅시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여기에 그냥 믿음이 아니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지요. 무슨 뜻입니까? 반드시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의 특징이 뭐냐, 그 안에서 나온 믿음과 사랑은 용수철 같이 되어서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갑니까?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의 응축된 주체를 묵사발 시키고 어디 안으로 끌어당긴다? 그 사랑이 나왔던 예수 안으로 우리를 잡아당기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믿는 것 자체, 사랑하는 것 자체, 그리고 믿음과 사랑을 유지하는 것 자체도 우리의 능력 밖의 문제지요. 만약에 나 혼자 존재한다면 우리의 능력밖에 있다 하면 우리에게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데 우리가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내 밖의 능력이 있다 하면 그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누구에게 돌립니까? 주님에게서 나온 거예요.
내가 나오지 말라고 이야기해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계속 나와요. 그것이 계속 나오면 우리는 그 계속 나오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대해서 한해서는 내가 보탠 것도 없고 내가 행한 것도 없이 그냥 주신 믿음과 주신 소망과 주신 사랑으로 살면서 즐기고 있으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하고 너무 좋아서 이렇게 눈동자도 안보이고 입은 좋아서 이렇게 있지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좋아서 입이 벌어졌어요. 이걸 유지시키는 것은 주님의 몫입니다. 왜, 나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 안에서 죽은 자로 다루어지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런 은혜가 나오는데 어떻게 나온다고 했습니까? 넘치도록, 서울 수해당하는 것 같아요. ‘넘치도록’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풍성하다.’ 이걸 쉽게 말하면 ‘잠겼다.’
머리카락까지 ‘들어가!’ 해서 그 머리카락 이상으로 물에 푹 잠겨버렸어요. 뭐 안에? 하나님의 긍휼 안에 푹 잠겨버린 거예요. 두 번 다시 네 행함 내세우지 말라고 푹 잠겨버린 거예요. 15절을 봅시다. ‘미쁘다’는 말은 믿음직스럽다는 말이에요.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야, 여기서 이것을 설명해야 됩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을 봅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되어 있지요. 방금 읽은 15절에도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래서 15절을 안보고 2장 4절을 바로 본 사람들, 전도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라고 굉장히 강조를 합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뜻은 무슨 뜻이냐, ‘하나님의 마음으로는 한명도 지옥 안보내고 다 천국 가게하고 싶은데 인간들 종내기가 그렇게도 성질 더러워서 내가 그렇게도 그렇게 건지려고 애를 써도 싫다고 싫다고들 그렇게 하니 할 수가 없어서 나 싫다는 너 같은 인간들 놔두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데려간다.’ 해서 천국 가는 사람은 천국으로 가고 지옥 가는 사람은 결국 자처해서 지옥을 가는 것이기에 영원한 형벌을 받아도 마땅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천국과 지옥 가는 사람의 리스트는 어디서 결정 나는 거예요? 이미 창세전에 결정 난 것이 아니고 창세후에 한 번 해 보는 거예요. 그리고 한 번 쑤셔보는 겁니다. ‘갈래 안 갈래?’ 갈래요, 하면 데려가고 ‘갈래 안 갈래?’ ‘안 갈래요.’ ‘지옥가거라’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강원도에서 감자만 캐면서 한 번도 예수 이야기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은 뭡니까?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한번도 ‘갈래, 안 갈래?’라는 말조차 못 들어봤어요. 평생토록 주위에 교회 다니는 사람도 한 사람도 없어서 그랬는데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런 사람을 위해서 패자부활전을 준비해놓았어요. 그것이 연옥입니다. 천주교에서 그렇게 했는데 멋지지 않습니까? 어떤 강원도 할머니가 평생토록 생전에 예수에 대해서 들어본 적도 없었는데 막상 죽고 보니까 연옥이라는 거지요.
연옥이라는 것이 중간기착지에요. 지옥이 이중구조로 되어 있는데 한번 떨어지고 다시 거기서 또 떨어지는데 그 중간 기착지가 연옥이에요. 평생토록 한 번도 예수에 대해서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들, 태어나자마자 죽은 애들, 유아실에서 까불다가 죽은 애들,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 단군할아버지라든지 부처 등 예수님 태어나기 전에 태어난 사람들, 그 다음에 태어났더라도 복음을 미처 듣지 못하고 죽은 강감찬이나 낙랑공주, 광개토대왕과 을지문덕과 성춘향이나 심청과 홍 길동 같은 사람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계절학기나 보충수업인 셈입니다.
여기서는 환경을 아주 더 빡세게 해서 일종의 고문실역할을 하는 겁니다. ‘이래도 예수 안 믿을래?’ 해서 ‘믿을게요.’ 한 사람은 천국으로 보내주고 그래도 고집부리는 것은 마귀와 함께 지옥 보내는 거예요. 이런 아이디어가 개신교에도 있습니다. 이런 아이디어를 ‘전천년주의’라고 합니다. 또는 세대주의인데 천년왕국동안 먼저 믿은 사람은 휴거해서 올라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아직까지 주님 무서움의 본때를 못 봐서 마귀에게 황충의 침 같은 쏘임을 받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못살겠습니다. 왜 이렇게 세상이 힘듭니까?’ ‘힘들지? 네가 요한계시록이 이런 내용인줄을 몰랐지?’ ‘몰랐습니다. 진즉이 요한계시록을 문자 그대로 믿지 왜 안 믿었어?’ 갑자기 요한계시록이 나오니까 신천지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그래서 이런 식으로 혼을 내면서 ‘아직 마지막 7년 대 환란이 남았어. 믿을래, 안 믿을래?’ ‘믿을래요.’ 하면 거기서 빼주는데 대신 상급은 없어요. 상급이 없으니 팬티바람으로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대요.
아예 소설을 써라, 소설.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창세전에 이미 결정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새삼스럽게 탐색을 하는 거예요.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이래서 예수 믿었는가를 탐색합니까? 사도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했으면 사도바울이 그렇게 핍박을 안 받아요. 왜, 이방종교와 똑같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전하는 모든 복음은 비웃음을 당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창세후의 인간들에게 나올 수 없는 이야기가 나와 버리거든요. 성령 받지 않고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나온다고요. ‘당신의 운명은 창세전에 이미 결정 났습니다.’라는 소식을 성령 받지 않고서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거예요. ‘내가 어떤 인간인지 당신이 나에 대해 아는 것이 뭐가 있다고 나의 운명을 미리 결정하는가?’
그것이 디모데전서의 이야기에요. ‘당신은 죄인이에요.’ ‘죄인인줄 뻔히 알면서도 저를 구원합니까?’ ‘구원은 당신의 행함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은혜 줄자에게만 은혜를 주시고 긍휼 입을 자에게 긍휼을 주시는 방법으로만 해서 천국은 그 사람들만 모이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죽어서 좋은데 가는 것이 천국이 아니고 예수님의 공로와 혜택을 입은 사람만 천국입니다.’
그러면 그쪽에서 뭐라고 합니까? ‘그러면 천국은 예수 자기 맘 대로네?’ 한다고요. 딩동! 천국이 예수님의 나라, 아들의 나라에요. 천국이 우리가 가고 싶은 나라가 아니고 예수님 본인의 나라에요. 하나님이 인정하는 천국은 예수님, 아들의 나라밖에 없어요. 우리는 양자니까. 예수님을 위해서 만든 놀이동산, 예수님의 공로로 된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우리가 예수님 공로로 들어가게 된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 복음으로서만 비로소 등장한 하늘나라, 천국의 개념이에요. 유대인들은 그것도 모르고 율법 지키면 들어가는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 하신 말씀이 ‘본 자손은 다 쫓겨나고 예수님이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는 백부장 같은 이방인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왜, 그들은 행한 것이 없지만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기 때문에 차지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예수님이 아니고 그 이름을 철수라고 합시다. ‘천국은 박 철수의 나라’라고 해 봅시다. 이것을 누가 믿겠어요. 내 이름이 따로 있는데 왜 내가 박철수의 이름을 불러야 되지요? 그런데 박철수의 영이 임하면 눈에서 레이저 나오지요. 예수의 영이 씌워버리면, 예수의 영으로 귀신 씌워 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주는 나의 구주십니다.’라는 희한하고 불가능한 고백들이 나온다는 말이지요.
여러분, 그 초심을 잊지 마세요. 그 첫사랑을. 주께서 여러분이 나쁘다고 해서 구원한 것이 아니고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을 의미를 줘가면서 구원한 거예요. 다만 예수님을 주라고 인정한다는 그 의미를, 그 없는 의미까지 집어넣어서 끄집어내면서 ‘이렇게 된 것은 네 뜻이 아니고 아버지하고 다 의논된 바다. 그러니 걱정할 것이 없다. 앞에서 내가 극장표 값 다 치렀으니까 그냥 너는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라는 식으로 우리를 질질 끌고 가는 거예요.
가면서도 우리는 곱게 안가지요. 두리번거리고 뭐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옛 행세가 그대로 나오지요. 그 때마다 많이 맞습니다. 그 때리는 회초리는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이미 다 이루었는데 왜 자꾸 미완성을 생각하느냐, 그래서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이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날마다 되풀이 되는 그것이 바로 성령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불가능한 현상입니다.
날마다 ‘다 이루었는데, 다 이루었는데 왜 자꾸 내가 그런 걱정을 할까!’ 계속 되풀이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일은 누가 감당하겠어요? 감당 못하지요. 어느 정도로, 감당을 하는지 못하는지 주께서는 사도바울을 통해서 극한 환난가운데 계속 집어넣어요. 가는 곳마다 핍박받고 쫓기고 어려움을 당하고 돌로 침을 당하고 세 번이나 태형으로 맞고 도적의 위협, 강도의 위협, 엄청난 수모와 환난을 당하고서 어지간하면 포기할 만도 한데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해 가면서 계속 반복적으로 십자가복음을 외치면서 끝까지 역사와 묵시의 만남의 사건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 일을 누가 감당하리오. 이 복음을 성령 받은 사람에게 감당케 하는 거예요. 제가 여러분에게 했다는 말을 함부로 못하는 것이, 성령 받은 사람에게 감당케 했다는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성령 받고 안 받고는 제 소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이렇다, 이렇다, 할 때 그 악인은 정해놓은 사람이 아니잖아요.
‘모든 사람’이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인간들이 사람들을 차별하는 그 차별을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모든’이라고 한 겁니다. 그러면 이 ‘모든’이라는 구체적인 의미가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이 요한복음 12장 32절에 나옵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여기서 ‘모든’에 해당되는 사람이 누군가 하는 것은 요한복음 11장 52절에 나옵니다.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12장에서 ‘모든’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택하신 모든 사람이지요. 그것이 흩어져 있는 자녀를 모으는데 그 모든, 흩어진 자녀를 끌어 모아서 만든 하나일 수밖에 없는 그 ‘모든’이죠.
하나 될 수밖에 없는 그 ‘모든’이니까 결국 그것은 뭡니까? 그 ‘모든’은 하나에서 나온 ‘모든’이기 때문에 그 ‘모든’의 특징이 뭐냐, 오직 구원받은 자기를 겨냥하지 않고 오직 구원해주신 한분의 행함만 생각하는 그러한 모임이 되는 거예요. 한분의 행함, 그 한 분이 누구지요? ‘예수님이 들려서 그 들린 예수님이 뽑아줘서 오라고 해서 왔다.’고 예수님의 행함만 이야기하다 보니까 누구 행함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까?
주님의 행함이 가득 차 있는데 알아서 눈치보고 낄 데 껴야지 자기 행함이 거기 왜 낍니까? ‘미리 아시고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신 그 모든 행함은 누구 행함이에요? 주님에게서 나온 행함인데 거기에 왜 자기가 끼지요? 로마서 8장 한 번 봅시다. 32절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뇨.”
여기에 ‘모든’앞에 뭐가 붙습니까? ‘우리’에 해당되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여기서 ‘모든’에 해당되는 사람은 주님의 은사를 받은 사람의 전부지요. 은사 안 받은 사람도 ‘모든’에 집어넣지 말라는 말이지요.
아들을 보낼 때는 아들이 필요한 사람에게만 아들을 믿을 수 있는 은사, 성령의 은사를 주는데 그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주께서 그냥 줬잖아요. 제가 행한 것이 아니잖아요. 줘서 왔잖아요.’라는 고백을 하는 사람은 너, 나를 비교하지 않고 전부 다 시선이 어디에 모인다? 오직 한분에게만 모이는 그 ‘모든’이 바로 ‘모든’(all)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 말이지요. 데살로니가전서에 나와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 하는 것은 자기 택한 백성인 모두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말은 요한복음 6장에 나와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를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다른 말로 하면 ‘아버지가 주신 모든 사람은 모두 내가 책임지고 예수의 이름으로 찾아가서 그 잃어버린 양을 필히 천국에 도달되도록 만든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뭐가 무가치하게 되어버려요? 내가 내 행함을 동원해서 천국가려고 아등바등 애쓰는 그 모든 애씀이 한 방에 다 무용지물이 되지요. 성령의 은사를 받아야 그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성령을 안 받으면 여전히 자기 행함의 가치를 포기할 수가 없어요. 응축된 자기주체를 놓쳐버리면 그동안의 자기휴식과 안정을 어디서 찾겠습니까?
그런데 은사를 받아버리면 이것은 자기 때문에 안정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 때문에 안정과 평화를 원한다? 예수 안에서 영원히 평안과 안정과 그리고 행복과 휴식을 그 안에서 즐기는 거지요. 예수 안에서의 기쁨을 느끼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평안이다.’ 안정되어 있잖아요. 누구자리에서? 자기자리에서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안정되어 있습니다.
이 안정된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를 시험하기위해서 주께서는 그 안정성을 흩을만한 시험들, 사태를 계속 일으킵니다. 우리 집사님도 뺑소니 사건 같은 것에 휘말렸다고 하는데계속 이런 사태를 일으켜서 이 안정성이 주님 안에서 안정성인지 아니면 예수 믿는다고 우기는 내 안에서의 안정성인지를 계속 흔들기를 하는 거예요.
흔들리면 흔들릴 수밖에 없지요. 흔들면 흔들리다가 이상스럽게 인간의 힘으로는 나올 수 없는 안정성, ‘이것도 주님의 뜻인데 뭐’ 하고 다시 오뚜기 처럼 다시 설 때 ‘아, 이게 바로 되풀이 되고 있는 안정성이고 묵시적인 성령께서 함께하고 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의 효과에 대해서 만끽하게 만드는구나.’ 이것을 알게 하시는 거지요.
그리 되면 일사천리로 디모데전서 이해 안 될 것이 없어요. 디모데전서 1장 18절에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서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얼마든지 싸우지요. 왜, 어차피 나한테는 무기가 있다, 없다? 무기가 없는 것이 아니고 아예 필요치 않지요. 무기가 아무것도 필요가 없습니다.
무기 없는 그 자체가 무기라. 아무것도 내 세울 것이 없는, 창녀는 창녀가 무기고, 세리는 세리자체가 무기에요. 창녀에서 포주로 발전한다고 해서 그것이 무기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그 자체, ‘나 같은 인간도 구원되었습니다.’라는 그 자체로 악마를 이기는 무기가 되지요. 평신도가 성령을 받았다, 그 자체가 내세울 것은 주님만 내세우는 거지요.
그럼 그 사람이 후에 집사가 된다, 권사 되고 장로 되고 목사가 된다, 그러면 항상 초심을 잊지 말아야 되지요. 장로가 무기되고 목사가 무기되면 안 되지요. 그것은 이미 사단으로 돌아간 셈이 됩니다. 19절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다음에 여기에 명단이 나오네요.
“그 가운데 후메네오 알렉산더…….” 여기 후메네오 손들어 보세요. 알렉산더 손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가운데 후메네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사실 오늘날 법으로 보면 이것은 명예훼손감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나오는 것은 이 사람들이 믿음에 파선하는 것은 무엇에 포함되어 있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로 꼭꼭 포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왜 이것이 포함이 되어 있어야 하느냐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이성이 있으면 납득이 될 만한 이야기를 사도바울은 한 적이 없고 사도바울은 뭐만 확인하느냐, ‘은혜 받으셨습니까?’ 그것만 확인하는 거예요. ‘십자가복음을 아십니까?’ 그것만 확인하기 때문에 그것 없이 행함으로 버티려고 하는 사람은 결국은 자기 본색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렇게 명단을 놔두는 것은 결국 선한 싸움의 결말이 분류작업에 있다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지요. 그 다음 2장으로 넘어가봅시다. 사도행전 26장 29절 먼저 봅시다.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아그립바 총독 앞에서 사도바울이 말대꾸 하는 대목입니다. 그렇게 아시고 디모데전서 2장 1절과 2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높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높은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간구하라.’는 이 말이 있는데 제가 아까 의도적으로 사도행전 26장 29절을 봤는데 만약에 오늘날 학자들이 설명하는 것처럼 ‘권력 있거든 좀 그 앞에 고개도 숙이고 빌어라. 왜냐, 복음 전파하는데 평안하게 하기 위해서 고개 숙이고 대들지 말라.’ 그런 쪽이라면 사도바울이 자기가 한 말을 사도행전에서 본인이 위반하고 있어요.
‘봐주세요. 복음을 본인은 안 믿겠지만 참 좋은 겁니다.’ 이렇게 나와야 하는데 아그립바 총독 앞에서 무슨 말을 합니까? ‘당신은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 그 소리를 한 거예요. 복음전파만큼 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없어요. 역사적 존재고 이미 죽어 있는 상태 아닙니까? 죽어 있는 상태에서 ‘잘 지내세요.’ 이것은 그냥 방치하는 것이고 정말 그 높은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냥 ‘도와주세요.’ 정도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가 당신보다 더 높은 자리에서 당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해야 됩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뜻이기도 하고요. ‘네가 높은 사람 앞에 있을 때 기죽지 말고 단호하게 복음을 전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어떤 ‘선교의 정책상 잘 해서 도움 받아라.’ 하는 정도가 아니고 적극적으로 ‘대통령 당신도 은혜만 받으면 지옥 안 갈수 있습니다.’라는 조, 그런 시선으로 그 사람들을 대하라는 말이지요.
‘당신이 예수도 모르면서 권력을 가졌다고 그것으로 인생 성공인줄 아는데 주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당신 같은 인간도 네 말 들으면 구원될 수 있습니다.’ 그런 조로 하라는 말이지요. 왜, 성도는 모든 권세보다 더 높은 권세로서 성도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가 손들고 되고 싶다고 해서 된 것이 아니고 세상 권세보다 더 큰 권세가 덮쳤기 때문에 성도가 되었기에 이 성도의 자긍심과 고귀함은 세상 권력 앞에서 조금도 기죽을 이유가 없는 거예요. 과감하게 그렇게 한 겁니다. 사도바울의 행적을 보면 그것이 죽 나와요. 그 다음에 2장 5절, 6절을 봅시다. “하나님은 한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 할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속전으로 주셨다.’고 하니까 어떤 교단에서는 이것을 무엇으로 보느냐하면, ‘속전으로 이미 죄용서가 다 되었는데 죄용서가 되었지만 실제로 효과를 내는 것은 우리가 자유의지를 발휘해서 이것을 믿지 아니하면 다 되었다 할지라도 이것이 접촉이 안 되어서 지옥 간다.’는 거예요. 어떤 교단에서,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모르겠다만 하여튼 어떤 교단에서 그렇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디에 어긋나느냐, 새 언약의 효과가 십자가에서 멈추느냐, 아니면 십자가에서 다 이룬 그것을 구원받는 사람의 그 심령에 집어넣는 것까지 새 언약에 포함되느냐, 그 문제로 결정 나겠지요. 어느 쪽입니까?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어떻게 되겠어요? 새 언약의 효과가 뭡니까? 옛 언약은 마음밖에 있는 말씀이지만 이제 새 언약이 오게 되면 이제는 마음속까지 주께서 다 이룬 것을 본인도 손 못 대는, 본인도 철거 못하는 깊숙한 곳에까지 그것을 집어넣는 것까지 다 해버리는 거예요.
포장이사도 이런 포장이사가 또 없습니다. ‘그냥 놀다 오세요. 들어오시면 깨끗하게 다 이사해서 정리되어 있습니다. 요새는 말만 그렇고 제대로 그렇게 하는 집도 잘 없어요. 진짜 포장이사는 ‘그냥 몸만 오세요. 우리가 다 합니다.’ 하지요. 그래서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하늘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들어온 것을 보고 믿어야지요.
‘웬 낯선 것이 왜 들어왔지? 이것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닌데? 이것은 내가 구상한 것이 아닌데 이것이 왜 들어왔지? 아, 주께서 집어넣었구나. 믿습니다.’ 뭘? ‘주께서 주신 선물임을 믿습니다.’ 뭔데? ‘십자가의 피와 부활이 하나의 선물로서 저에게 장착되어 있습니다.’ 그 성령이 임하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내가 손댄 일도 없는 어처구니없는 이것을 고백한다는 것은 진짜 안에 뭐가 있다는 뜻이에요.
없으면 그런 소리 안하는데 진짜 있어요. 있기 때문에 ‘절대로 내가 행해서 유지하거나 보관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내가 예수 믿고 난 뒤에 착하게 살면 유지되고 나쁘게 살면 왔다가 휙 가버리고 이런 것은 없어요. 들어올 때 타협했습니까? 오징어구멍내서 얼굴에 쓰고 돈 봉투 하나 내면 한발자국씩 떼면서 ‘함 사세요.’ 그렇게 했습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그냥 쑥 들어왔잖아요. 도둑놈처럼 쑥 들어와서 안 나갑니다. 우리의 주인이 되고 우리는 주의 종이 되었어요. 그 다음부터는 그분이 의인이니 우리는 의의 종이 된 겁니다. 우리는 주의 의를 소개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죄인이지만 주께서 다 이루었다, 그 소리밖에 할 수가 없어요. 이것은 완전히 들이박혀서 나가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예수 믿었습니까?’ ‘주의 선물입니다.’ ‘나는 왜 그런 선물을 안줍니까?’ ‘선물 주는 분한테 이야기를 해야지 왜 나보고 이야기합니까? 나는 받았을 뿐이고 당신은 안 받았을 뿐이고.’ 그러니까 사단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뭔가 있는가 싶어서 왔다가 가버린 거예요. 받은 것이 있다면 ‘주께서 그냥 주셨습니다.’하고 주 만 이야기하면 아무 문제없는 거예요.
예수도 끄집어내고 자기 행함도 끄집어내고, 자기 행함이 왜 나오고, 그게 왜 나옵니까? 거기서 행함이 왜 튀어나옵니까? 이상해요. 그것은 자기 힘으로 자기 행함으로 예수 믿어서 집어넣고 자기 행함으로 행함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내놔보라고 하면 자기 행함만 내놓는 거예요. 받은 선물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이런 구색을 갖추면 신자 되는 줄 알고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이해하지요. 오죽하면 그런 식으로라도 집어넣고 싶겠어요. 한구석에 피도 집어넣고 행함도 집어넣어서 균형 맞춘 신학을 한다고 다 집어넣으니 이거 치면 이리로 피하고 이거 치면 이리로 피하고, 막사나, 행함 내놓고, 행함으로 구원받나? 아니 피로! 얼마나 편리한지, 참 편리해서 좋겠습니다. 그런 것이 인간들 쪽에서 가능한 거예요.
인간들이 가능한 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육의 열매지요. 지식으로 그렇게 포장하는 겁니다. 십자가를 믿었으면 십자가정신이 나오고 십자가삶이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피로 왔다가 행함 내놓으라는 그 소리하고 똑같은 소리 아닙니까? 십자가의 삶, 성령의 삶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는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하이카처럼 입이 째져서 그러지요. 너무 좋아가지고. 내가 죄인 에 이기에 사는 일 부담이 없어요. 나는 피보험자이기에 부담이 없어요. 아버지 돌아가셔도 상조회사에서 다 와주고 전혀 장례식에 부담이 없어요. 파출부도 세 명 와주고, 아무 부담이 없어요. 일오사사 공사사육, 일오사사 공사사육, 아무 부담이 없어요. 2년 만기, 보험료 인상도 없고 한번 내면 그것으로 끝이에요.
그 이야기를 디모데 전서는 계속해서 꾸준히 이야기합니다. ‘한분 때문에 되었다. 제발 그 한분의 자리에 네가 좀 끼지 말라.’ 그 말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그 중보자 한 분이면 된다.’ 그 다음에 2장 7절에 보면 ‘참말이고 거짓말이 아니다. 이것을 위해 내가 사도로 세움을 입었다.’ 라고 하지요. 그래도 가버리는데 어떻게 합니까?
알렉산더, 후메네오, 이런 인간들은 이런 말을 해줘도, 이런 말을 그 사람들이 분명히 들었어도 그 사람들이 떠나 버렸어요. 뭐냐 하면 소통, 대화가 안 된다는 거예요. 네 속에 들어 있는 것과 내 속에 들어있는 것과 차이가 나니까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 들어요. 이 사람들이 이럴 때 믿음이 없다고 하지 않고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고 합니다.
8절, 9절을 보면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고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여기서 아담한 옷이 얼마짜리입니까? 얼마짜리 옷을 아담하다고 합니까? 무슨 메이커가 아담한 옷 이지요?
옷가게 하는 집사님 어디 가셨지요? 아담한 옷이라는 것이 몇 만원 이하짜리를 말하는 겁니까? 이것은 뭐냐, 죄인 중에 괴수인 나에게 주신 은혜가 유지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나한테 너무나 넘칩니다. 감사함으로 입습니다.’ 분을 일으킨다는 것은 ‘이것은 내 주제에 해당이 안 돼.’ 하고 화를 내잖아요.
‘이것은 나에게는 어처구니없어. 감히 나를 어찌 보고.’ 이것이 바로 남자들의 혈기인데 그것은 은혜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고 은혜를 잊어버린 거예요. 은혜를 잊어버리게 되면 다시 혈기가 나오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이 말씀이 율법적 기능을 하면서 계속해서 나무라는 겁니다. 왜 같은 동창생인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명품으로 감아놓았다는 말이지요. 모자, 스카프, 신발까지 다 ~똥, ~똥, 다 똥으로 쳐 발라 놓았어요. ‘나도 그동안 아담하게 많이 살았다.’ 할 때 다시 한 번 ‘우리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을 담지 하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전도서의 말씀이 맞아요. 너무 선하지도 말고 악하지도 말고. 너무 선하려는 그것도 경쟁이 돼요. 아까 명품으로 도배를 한 불신자 동창생을 만나는가 하면 이번에는 또 누구를 만나느냐, 수녀동창생을 만납니다. 유기농법으로 한 간장이나 된장 만들어서 공동체 생활하는 수녀들 있잖아요. ‘아, 저렇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대체 나는 뭔지.’ 거기서 우울해서 또 ‘나는 죄만 짓는구나.’ 이러지도 말라는 말이지요.
그저 그야말로 아담하게, 아담하게 그냥 사세요. 형편대로, 너무 오버하지 마시고, 너무 악하지도 너무 선하지도 마시고. 그쪽은 그쪽 스케줄이 있고 나는 내 쪽의 스케줄이 있어요. 애가 서너 명씩 달렸는데 그런 내가 뭘 어쩐다는 말입니까? 언제 그런 것을 해요. 애 다섯 명 놔두고 무슨 사회봉사를 해요. 자기애나 키우는 그것이 봉사에요. 부녀회가서 봉사한다고 나대지 말고 사대 강 사업 반대한다고 피켓 들지 말고 자기애나 잘 키우면 돼요.
그런 것 할 형편이 되면 그때는 하면 되고. 그러니까 항상 복음의 기준이라는 것은 첫사랑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그겁니다. 요즘같이 힘든 세상에 둘 키우는 사람 보면 존경스러워요. 세상에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둘을 키우겠습니까? 셋은 초월? 묵시? 그것은 너무한 거고 둘만 키워도 얼마나 힘이 드는지. 그렇게 키우면서 또 자기 죄가 펄펄 나오고.
응축된 주체가 솜씨를 발휘해서 나름대로 낮추고 낮추시는 환경이 되는 겁니다. 저녁 먹고 합시다. 2011여름수련회 7강
디모데전서와 후서의 기록 연대가 좀 달라요(전서는 63년, 후서는 66년). AD 61년에 사도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2년 동안 갇혔다가 잠시 풀려납니다. 풀려나서 장화같이 생긴 이탈리아, 그리고 아드리아 반도가 나오고, 그 옆에 마케도니아, 아가야가 있고, 바다가 있고, 여기에 키프러스 섬이 있고, 또 크레타 섬이 있어요.
잠시 풀려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 디도를 대동하고 빌립보를 방문합니다. 방문하면서 크레타 섬에 들러서 복음을 전하고 디도를 그 섬에 목회자라 남겨두고, 빌립보를 거쳐서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고 그곳에 디모데를 목회자로 남겨두고 바울은 마케도니아로 갑니다.
그리고 난 뒤 65년 7월 19일 로마에 큰 화재가 발생했고, 그 책임을 그리스도인에게 뒤집어씌웠는데, 바울은 그 때 고린도와 밀레토스 지역을 여행하다가 체포되어서 다시 투옥되고 죽기 전 마지막 디모데 후서를 디모데에게 편지로 보내고 66년쯤 참수당하면서 사도바울의 사역은 끝납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의 경우에 이것을 어떤 관점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하면, 종말론적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종말론적 관점이란 개인의 마지막도 종말이 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시대 자체가 종말 분위기로 흘러가는데, 그렇게 되면 종말에만 일어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어떤 현상인가 하면, 한마디로 개판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흔들릴 수밖에 없고 모든 사람이 시대에 대해서 신뢰성을 잃었기에 내 팔 내가 흔드는 그런 시대에서 과현 하나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생활해야 되는가 하는 것이 디모데전,후서에 가득 차 있습니다.
성도의 생활을 종말론적으로 바라볼 때 그 생활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제가 지난 시간에 응축된 주체에 대해서 이야기했지요. 응축된 주체에 어떤 법이 들어오게 되면 도피를 해요. 왜 도피하는가 하면, 자기에게 자유가 있고, 이 자유는 내가 할 수 있는 가능성 있는 자유를 발휘하려고 합니다. 가능성 있는 자유가 발휘되면 그 안에서 자기는 안식과 평화를 누리면서 ‘역시 나는 가치가 있어.’ 라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감당 못하는 불가능한 법이 계속 오면, 자기의 소박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피해서 도망갑니다. 전혀 성경 말씀이 들리지 않는 곳으로 숨어 들어가게 됩니다. 교회 안 나오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지금 밥 먹고 사는 일도 힘들어 죽겠는데 제발 간섭 좀 하지 말라는 거지요.
종말에는 사람들이 ‘자기만 사랑(딤후3:1)’하는데 이것이 종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소박한 나의 즐거움을 방해하지 마라. 이 정도 누리기 위해서 내가 그동안 얼마나 애섰는데 이것마저도 죄냐 의냐 따지면 나는 도대체 내 마음에 안식을 얻을 여지가 전혀 없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고 반발하겠다.’ 라는 식으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자유를 발휘할 때 자기 자유의 가치가 고스란히 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그마한 선행을 했는데, 이것마저 죄로 규정해 버리면 도대체 어디로 피하란 말인가?’ 그러면 복음 전도자는 말하지요. ‘피하긴 왜 피해? 주님 앞에 나와야지.’ 이 말이 듣기 싫은 거예요.
주님 없는 곳에서 내 착함이 스스로 나의 기념물이 되는 그런 소박한 나만의 공간을 꾸리는 것이 예수 믿는 것보다 훨씬 행복한데 어떻게 합니까? 이 자기만의 소박한 공간에는 무엇이 포함되는가 하면, 고난 받고 고생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이것이 하나의 업적 혹은 훈장처럼 갖기를 원합니다.
험난한 인생살이 고추보다 더 맵다고들 합니다. 이런 소리를 하면서 고추보다 더 매운 인생살이를 견디는 놀라운 자신의 의지와 결단. 이 가치를 어디서 찾습니까? 십자가 앞에서? 아니죠. 나 홀로의 세계에서 찾습니다. 그 가치는 극도의 환희와 더불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이게 소박한 나만의 행복이죠. 이 행복을 제발 탓하지 말라는 거지요.
그래서 원룸, 투룸 이런 자기만의 공간에서 타인의 간섭을 배재한 채 패쇄적인 시간을 갖고 싶은 겁니다. 결혼을 했어도 자기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요. 그런데 이것이 과연 성도가 본 받을 많은 풍조인가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이러한 풍조, ‘이 악한 세대에서 너희를 건진다.’고 갈라디아서 1장 4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응축된 주체(나만의 소박한 즐거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를 십자가로 구원했다는 것을 빌미로 엄청난 율법이라는 말씀을 쏟아 부으면 예수 믿는 재미도 전혀 못 느끼고, 본성이 세상 사람과 똑같은데 구원을 받으니까 이것이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그렇다고 교회에서 만날 살 수도 없고.
그래서 여기에 대한 종말론적 관점을 하기 전에, 먼저 이러한 종말론적 관점, 묵시적인 것이 찾아오지 않은 인간들 사이에서 개인주의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노력했던가 하는 것부터 알아야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것을 알아야 교회에서 소위 윤리, 도덕이라고 성경 말씀을 근거로 삼는 것이 사실은 종말론적 관점에서의 성도의 삶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보편적인 윤리, 도덕이라는 것을 언급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하는 겁니다.
동양철학에 보면 공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네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 너도 하기 싫어하면서 그것을 남에게 하라고 시킬 수 있는가?” 이것을 ‘인(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장자라는 사람이 반박하고 나섭니다. ‘네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고 하면 결국은 네가 보기에 남을 평가할 때 너와 똑같아야 만족한다는 독단적인 평가가 개입 된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다 개성이 있는데 내 마음에 안 든다고 적을 만들면 되는가? 내가 나를 보는 그 기준으로 남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어떻게 ‘인’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은 폭력이다.” 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면 장자는 ‘공자는 잘못 생각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고 남이 원하는 것을 내가 해주면 된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양보의 미덕, 희생의 자세죠. 내가 원하는 것을 남한테 해주는 것이 아니고. 자기는 개고기 좋아하지만 남은 싫어해요. 그런데 ‘맛있으니까 먹으라.’ 이것은 공자의 논리고, ‘네가 먹고 싶은 것을 나에게 먹으라고 강요하지 마라.’ 이것은 장자의 논리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신이 개고기를 좋아해도 상대가 싫어한다면 자기 좋아하는 것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보는 겁니다. 이건 마치 십자가 정신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이것은 십자가 정신이 아니라 동양철학입니다.
이런 것은 성령을 받지 않아도 인간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그런 종류 중 하나란 말이지요. 이런 것들을 교회에서 성령의 삶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종말론적 삶, 뭔가 빠져나온 근거가 없어요. ‘아, 남이 원하는 것을 내가 제공해 주면 우리는 이 땅에서 구원 받을 필요 없이 그냥 여기서 그리스도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된다.’ 이렇게 오해를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런 장자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한 사람이 묵자입니다. 묵자는 ‘남이 원하는 것을 한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지금 당장 필요한 것,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원하는데 이런 것들을 제공할 수 있는 풍부한 여건이 사람들에게는 없어요. 그렇다면 이것을 누가 해야 하는가 하면 국가가 이것을 담당해야 된다.
이렇게 주장하니까 또 어떤 사람이 반박을 합니다. 개인이 남이 필요한 것을 해주지 말고 복지정책을 펼쳐서 국가에서 도와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그냥 내가 가진 것으로 좀 나눠주면 폼은 나고 기분은 좋지만 실제로 큰 도움이 안 됩니다. 교회에서 노인들 예배 참석한다고 봉투에 2만원 넣어 주는 것과 동사무소에서 노인 최저 생계비로 매달 30만원 주는 것 중 어느 것이 낫습니까? 국가에서 하는 것이 훨씬 낫지요.
어떤 사람은 묵자의 주장에 대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묵자야, 만약 군주가 욕심을 부려서 가난한 사람을 보고도 안 도와주면 어떻게 하냐?” 라고 물으니까, 묵자는 “그 때는 신이 벌을 내린다.”고 했어요. 이게 말이 됩니까? 신이 벌을 안 내리면 그 때는 어떻게 합니까? 결국 동양철학은 신비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신인감응설’이 있어요. 군주가 잘 하면 곡식이 잘 익고, 군주가 악하면 신이 벌을 내린다는 말이에요. 신인감응설이 동양에서 존재했다는 말은, 신을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마지막 최후에 응어리진 복수심, 한풀이는 누구 몫입니까? “신이시여, 조물주여, 자연이여!” 어떤 명칭을 붙여도 ‘제발 이 억울한 것을 좀 풀어주소서.’ 라는 쪽으로 미지의 신에게 호수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구약적으로 말하면 언약이 없는 이방 신이 되겠지요.
귀신한테 비니까 자기들도 너무 한심하다 싶었는지,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군주에게 맡기되 군주가 제대로 통치하도록 백성들이 간섭하면 된다.’는 주장이 나와요. 점점 민주주의 쪽으로 나가고 있지요? 그러면 백성들이 군주를 견제할 수 있고 간섭할 수 있다면, 군주는 백성들 편에 서게 되면 군주의 결단성을 백성에게 양보한 셈이 되니까 그러면 나라꼴이 되겠는가 하는 문제가 또 생깁니다. 점점 더 교회 조직문제로 나가지요? ‘목사가 교인들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 라는 동양철학의 고민과 연결 되지요.
손자는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군주가 백성을 다룰 때는 마치 지휘관이 부하를 다룰 때처럼 하면 된다.’ 어떻게 하는가 하면, ‘항상 돌멩이를 위태로운 곳에 두어야 한다. 사람이 위기가 없으면 성심, 성의껏 일하지 않는다. 늘 위기를 조성해서 한 시스템으로 몰아붙여야 그들이 정신을 차리고 일한다. 군인이 전쟁터에 나갔을 때 적보다 자기 지휘관을 더 무서워해야 용감하게 나가 싸울 수 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지휘관을 무서워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실전보다도 연습 때 더 혹독하게 훈련을 시켜야 되는 겁니다. 이것의 좋은 예로, 임금 앞에 궁녀가 있는데 궁녀가 말을 잘 안 들으니까 궁녀 중 우두머리를 죽여 버렸어요. 왜 궁녀가 말을 안 듣는가 하면, 궁녀는 임금 지시만 따릅니다. 그런데 지금 지휘관은 본인이단 말이죠. 그러면 본인 말 안 들으면 과감하게 목을 침으로 말미암아 예전 지휘관은 목을 치지 않았는데 새로운 지휘관을 목을 칠 때는 과거에 매였던 군주에 대한 미련과 습관들은 일소에 사라지고 새로운 체제로 바뀔 때 일사분란하게 백성들은 지휘관의 말을 듣고 움직이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어떻습니까? 카리스마가 넘치지 않습니까? 이 카리스마를 교회에서 활용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위대한 목사님이 되겠지요. 날마다 교인들을 위기에 몰아넣고, 순종하지 않으면 치리하고, 그리고 한 시스템에 몰아넣을 때 능률이 오른다는 이 아이디어가 바로 육에 속한, 성령 받지 못한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그런 면면들이죠. 이것이 바로 국가의 행정과 조직을 운영하는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뭡니까? 어디서 구원 받는다는 말입니까? 바로 이러한 악한 세대에서 구원 받는다면 악한 세대에서 통하는 윤리, 도덕에서도 구원을 받아야 됩니다. 세상의 좋은 것들을 교회에 심어서 멋있는 이상적인 교회를 만들 생각을 하지 말고 세상 자체에서 구원 받는다면, 세상 자체에서 통용되는 윤리, 도덕, 질서, 종말론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안 믿는 그런 세상에서의 모든 원리와 정신으로부터도 우리는 해방되어야 합니다.
이런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성령께서 예수님을 다루어서 그 당시 질서와 윤리와 도덕으로부터 과감하게 벗어났잖아요. 그것 때문에 마귀 들렸다고 욕을 듣긴 했지만 결국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났잖아요.
똑같은 예수님의 영이 우리 마음에 왔다면 우리는 세상을 유지하려는 윤리, 도덕과 이 세상을 벗어나려는 윤리, 도덕이 어떤 차이가 나는지를 알고 있어야 되는 겁니다. 제가 이런 소리를 많이 하는 이유가 디모데전서를 읽다보면 바로 그런 식으로 주석과 해석이 되어 있습니다. 종말론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있는 교회 잘 꾸려보자.’는 식으로, ‘이런 식으로 하시면 교회 참 잘 됩니다. 이렇게 하면 교회에 카리스마가 있어서 교회 질서가 잡힙니다.’ 라는 식으로 해석을 한 거예요.
여기에 동원된 윤리, 도덕이란 것은 결국 예수님이 하신 방법이 아니라 동양철학, 인간의 내면에서 나올 수 있는 그런 요소들입니다. 노자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텅 빈곳이 오히려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가 나온다는 겁니다. 바퀴가 있다면 바퀴 안이 텅 비어있기에 바퀴가 돌아가고, 잔은 안이 비어있을 때 물을 담을 여지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잔으로 있는 것처럼.
없는 것으로 인하여 있는 것이 없는 것을 뒷받침함으로 있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는 보이지 않지만 진리를 담을 수 있는 경계는, 존재하는 우리가 없는 것을 받들 때 진정한 이 세상 자연을 바꾸어 나가는 참된 삶이라고 보는 겁니다. 굉장히 멋있지요? 그래서 김용옥 교수가 뿅 갔지요.
그런데 장자는 이렇게 말했어요. 현재 없음이 있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는 그것이 곧 도(道)가 된다는 겁니다. 눈밭에 길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눈 위를 걸으면 그것이 눈밭에 나는 최초의 나의 길이 되는 거예요. 물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면 그것이 곧 내가 개척하는 나만의 인생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도 멋있지요? ‘왜 자꾸 의지하느냐? 왜 연약하게 믿고자 하느냐? 스스로 가라. 그러면 간만큼 너의 길이 되고, 그것이 너의 인생이 될 것이다.’
‘누구한테 의탁하지 마라. 이 세상은 도(道)도 없고, 법도 없고, 진리도 없다. 단지 네가 하는 그것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런 이론을 들으면 예수 믿을 필요가 없겠지요? 꼭 예수 믿어서 진리를 알 필요는 없잖아요. 이런 장자의 이론이 성경 말씀보다 더 확 다가오지 않습니까?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면서 이런 동양철학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이런 것에서 벗어나라고 십자가 피를 주셨는데 우리는 예수님 피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동양철학이라면 그것이 묵시적 존재인지 역사적 존재인지 분간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받은 묵시적 존재로써 이 디모데전,후서에 나오는 이러한 마지막 때의 풍속에서 어떻게 우리가 성도의 제 모습을 갖춰나갈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도피의 방치에요. 법이 오게 되면 우리는 도망치기 바쁩니다. 지킬 것은 지키지만 보통의 경우 못 지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도망쳐야 그나마 있는 나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법을 만나면 이 법은 거룩한 것이고, 나는 왜소해요. 그래서 법 앞에서 기가 죽어요. 살아도 살맛이 안 나는 거예요. 나는 나의 존재 가치로 인하여 살고, 그 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소망 때문에 사는데, 여기다 법을 주어서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면 ‘헛된 것 왜 사는데?’ 이렇게 나와요.
그래서 우리는 법을 피하기 바쁜데, 피하게 되면 응축된 주체의 자기 즐거움 밖에 안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되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요. 그래서 오는 불안감. 나는 유한한 것에 대해 자유로운데 무한한 법이 주어지면 감당할 수 없어서 오는 그 괴리. 뭘 해도 벌 받을 것 같고, 뭘 해도 제대로 못했다는 책임을 물어서 큰 벌이 내릴 것 같은 불안감. 이것 극복하려고 오늘도 새벽기도 가서 약간 안심을 얻었는데, 돌아서면 또 불안하고.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아예 모든 것 다 잊고 살고 싶은데, 그러면 또 후메내오, 알렉산더(딤전1:20) 생각이 나고. 그래서 딜레마에 빠지지요. 이런 딜레마가 있으니까 신학자들은 기껏 한다는 소리가 ‘이미와 아직의 긴장 상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요.
우리 자아 속에서는 사랑이 나옵니다. 법이 오게 되면 법으로 보이는데 사랑이 방출되면 그 멀리서 오는 법이 법이 아니고 바로 나에게 이미 주어진 사랑과 같은 질의 사랑이 등장합니다. 그러면 사랑 앞에서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법의 최종 상태가 사랑이잖아요. 모든 것이 용납되지요.
그러면 그 법은 사랑 안에서 방출되기 때문에 이 사랑이 저 뒤에서 오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는 거예요. 어떻게? 모든 것을 용납하면서, 모든 것을 긍휼히 여기면서.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기 때문에 마음껏 누리는 입장이죠. 디모데후서 2장에서는 이것을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라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3장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렇게 뜸을 드리고 있는데, 3, 4, 5, 6장은 쏜살같이 지나갑니다. 여러분 속에 있는 사랑만 방출하면 이 모든 말씀들이 굉장히 반가워요. 어떻게 반가운가 하면, 성경 말씀 한 구절 한 구절 뒤에다 추임새를 붙이세요. ‘사랑으로’를. 뭐든지 ‘사랑으로’
그리고 여기서는 사랑으로 마중 나오고. 사랑으로 마중 나간다는 것은 나는 빠지고 내 속에 있는 사랑이 날 대신해서 이 성경 말씀에 마중을 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하는가?’ 사랑이 없으면 애초부터 이야기가 안 되지요. 받은 사랑이 없으면 이 이야기의 대상이 안 됩니다.
그러면 사랑이 뭡니까? 처음 사랑이죠. 첫사랑이 뭡니까?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긴 거죠. ‘불쌍히 여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라는 마음으로 다가가면 됩니다.
3장 1절을 봅시다.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감독된 사람은 첫사랑을 유지하면서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보여줄 주님의 사랑이 중요하기 때문에 절대로 자기의 고난이나 목사직 소유가 끼어들면 안 되지요. 왜? 보여줄 것이 사랑밖에 없기 때문에. 심수봉이 [사랑밖에 난 몰라.] 라는 노래가 있는데, 그 노래에서 말하는 사랑은 ‘나는 받는 사랑 외에는 몰라.’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의 사랑은 방출하는 사랑이에요.
주께서 내게 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도 주셨다는 것. 그 사랑 밖에 난 몰라. ‘나는 목사로써 내 사랑 끄집어낼 테니까 너는 집사로써 네 사랑 끄집어내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만약 김 집사가 ‘나는 사랑 없는데요.’ 이러면 이야기가 안 되지요. 교회는 사랑으로 하나인데, 사랑으로 뭉칠 수가 없지요.
‘사랑을 내 놓으라.’ 이 말은 ‘나의 사랑을 내 놓으라.’는 말이 아니고, 나로 하여금 나를 죄인 되게 만드는 그 위대한 사랑을 내 놓으란 말이지요. 그게 바로 목사입니다. 그게 바로 집사고. 3장 끝났어요.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 이런 말씀들을 일일이 해석해서, ‘지켰는가, 안 지켰는가?’를 따지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하면, ‘다섯 개는 지키겠는데 하나를 못 지키면 목사입니까, 아닙니까?’ 이런 문제가 생겨요.
3장 2절에 “감독은?” 하고 나열되어 있는데, 1) 책망할 것이 없으며, 2)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3)절제하며, 4) 근실하며, 5) 아담하며, 6) 나그네를 접대하며, 7) 가르치기를 잘하며, 8)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9) 구타하지 아니하며, 10) 관용하며, 11) 다투지 아니하며, 12)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12)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 13) 새로 입교한 자는 안 되고, 14) 외인에게 선한 증거를 얻은 자.
14개가 나오지요.
집사를 봅시다.
1) 단정하고, 2)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3)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4)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5)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 5개 나오네요.
그러면 감독(14개)보다 집사(5개)가 훨씬 쉽네요? 그렇습니까? 그런데 어떤 감독(목사)이 13개를 지키고 1개를 못 지켰다면 13개가 무효 됩니까?
이것은 14개, 5개의 배후에 뭐가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주님의 긍휼하심이 교인들에게 ‘목사는 이렇다.’고 하기 전에 먼저 목사부터 지적하고 들어가요. 그러면 여기에서 견딜 수 있는 목사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나는 14개 항목 중에 어느 것도 항상 지킬 수 없는, 자격 없는 자가 바로 저입니다.’ 라고 할 때, 목사는 물러가고 ‘목사 됨’이라는 디모데전서 3장의 말씀만 전면에 나타나겠지요.
그러면 교인들이 뭘 생각합니까? ‘주님께서 목사 되게 하시는구나.’ 어떻게? 그 목사가 날마다 이 말씀 보고 ‘나는 목사 값도 못합니다.’ 라고 그렇게 활용하는 그 모습이 진정한 목사다운 거지요.
그래서 어느 누구도 다 ‘부족합니다.’ 라는 소리가 나오지요. 목사가 나그네를 잘 대접한다고요? 온 동네 거지 다 모일 겁니다. ‘나그네 대접’을 지키려고 하지 말란 말이지요. 나그네 대접하다가 말 안 들으면 구타할 수가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나그네 대접하다가 구타한 것은 사랑이냐, 사랑 아니냐?’ 이런 문제가 또 생깁니다. 그러면 또 새로운 항목을 추가해야 되고.
기본은 이겁니다. 주의 말씀은 살아있고 목사 된 사람은 늘 말씀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는가? 목사를 훌륭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계시)만 성도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목사 값도 못하는 한 사람 뽑아서 말씀 앞에 대면해서 ‘이 말씀 앞에 어느 인간도 못합니다.’라는 말을 함으로 목사 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교인들은 목사를 보는 것이 아니고 디모데전서 3장을 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감독(목사)은 저런 모습이구나.’ 그래서 목사라는 자리가 중요하지 목사라는 인간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한 번 목사는 영원한 목사다.’가 성립이 안 돼요. 목사가 그 자리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목사가 언제 목사 값을 못하는가? ‘난 이것 지켰다.’고 나설 때, 그것은 목사로서의 자격이 없는 겁니다. ‘한시도 못 지킨다.’ 이렇게 나와야 말씀이 나오는데, ‘나는 오늘 2개 지켰다.’ 이렇게 나오면 그것은 주의 증인이 아니고 목사 본인의 목사 됨의 증인입니다. 이렇게 되면 노자, 묵자처럼 하나의 권력으로 그 교회를 질서 잡으려 하는 동양철학적 사고방식이 그대로 성령이라는 왜곡된 이름으로 튀어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권사는 없는가? 권사는 없습니다. 권사는 인간들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없어요.
그 다음에 집사를 봅시다.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옷을 어떻게 입어야 단정한 겁니까? 단정의 기준이 뭡니까? 단정한 것의 기준이 없다는 말은 우리는 늘 단정할 수 없는 인간이란 말이죠. 만약 내가 ‘나는 단정하다.’고 하는 그 순간 그 사람에게는 더 이상 ‘단정하라’는 말씀은 불필요한 것이 되지요. 왜? 이미 단정했기에 더 이상 이 법이 필요 없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법이 올 때 사랑이 없는 사람은 법에서 도망치고 싶지만 사랑이 있는 사람, 다시 말해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사람은 어떤 법이 와도 ‘이 죄인을 용서한 주님의 말씀’으로 받게 되고, 이 사랑으로의 마주침이 성도가 보여줄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란 겁니다.
11절에 여자 집사에 대해 나옵니다.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
12절에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여자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그러면 결혼 안 한 사람은 집사 못합니까?
13절에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사랑이 있기 때문에 꿀리지 않지요. 왜? 못난 인간을 사랑해 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얼마든지 즐겁게 어떤 일도 감당할 수가 있는 겁니다. 이것이 ‘믿음에 큰 담력’입니다.
15절에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살아 있다는 말은,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겁니다.
4장에 보면,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 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여기서 뭐가 나오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이러이러한 음식은 먹으면 안 됩니다.” 라고 했을 때, 그 고기를 안 먹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뭐든지 ‘하지 말라’고 할 때, 그 말대로 하면 영광이 될까요? ‘동으로 가라.’고 할 때, 동으로 안 가는 경우가 어떤 경우입니까? 많지요. 서로 갈 수도 있고, 남으로, 북으로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고.
하나님 뜻은 이겁니다. 뭘 하지 말라고 할 때 ‘감사했느냐, 감사치 않았느냐?’ 이걸 보는 거예요. ‘딴 사람은 했지만 나는 그것 안 했거든.’ 이건 의미 없다는 겁니다. 왜? 자기 주체의 응축이 나오기 때문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식으로 하는 것이 어떤 법이 오더라도 “이런 법도 못 지키고 그 법을 통해서 내가 다시 한 번 마음 낮추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이 말씀이 살아 있는 교회가 된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로마의 개인주의 이방 풍속과 차이 나는 모습입니다. 주 예수님께 감사하고, 용서하심에 감사하는 그 모습이.
그 다음 5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이 말은, 기도 행위와 말씀 읽는 행위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과 통하는 기도로 거룩해 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거룩의 실체가 누구에게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겁니다. 내 기도 행위로 내가 거룩해 지는 것은 아니에요. 하나님은 살아 계시니까 기도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으니까 말씀으로 우리가 거룩해 진다는 뜻입니다. 하여튼 모든 것을 내 쪽으로 끌어당기면 안 됩니다.
4장 7절에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육체로 인하여 경건한 것과 하나님의 말씀이 원하는 경건의 차이점을 알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 이미 폼 나는 경건, 형식화 된 경건이 많이 유행을 했어요. 이런 경건과 성도의 종말론적 모습의 경건이 달라요.
종말은 어떤 힘으로 옵니다. 성령의 힘이 아니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결코 종말이란 의식이 생기지 않습니다. 종말이 언제입니까? 2050년 입니까, 아니면 2030년 입니까? 시간을 보지 말고 질을 봐야지요.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전부 개인주의고 하나 됨은 없고, 모두가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이 풍습이 종말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종말론적 삶에서 경건이란 것은, 이 세상이 종말이라고 느끼면서 사는 거지요.
제가 예전에 책을 서평 한 것이 있습니다. 참 인간이 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제시하는 단체들을 순회하면서 그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하도 오래 전 일이어서 책 제목을 잘 기억 못하겠는데(나를 찾아 떠나는 17일간의 여행?), 이 책에 여러 방법들이 나와요. 그게 뭐냐 하면, 연습하면 되는 경건의 방법들입니다. 그러나 이들 단체의 공통점이 있어요. 지금이 종말이라고 말하는 단체는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 성령 받지 않은 자들이 마지막(종말)이라고 하면 그야 말고 개판으로 막살게 됩니다. 이제 죽을 날이 6개월 밖에 안 남았는데, 죽기 전에 해야 할 일 20가지를 기록합니다. 그 가운데 나를 괴롭히고 미워한 자를 위한 복수도 있고, 그 마지막에는 ‘사랑하는 자의 품에 안겨 죽는 것’이라고 적어놓았어요. 이게 불신자의 종말론적 삶이잖아요.
그런데 이것은 사적인 것이기 때문에 복수할 것은 복수 하고 죽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종말에는 그 복수를 누가 합니까? 예수님께서 우리한테 복수를 할 수 있는 분인데, 그것이 우리한테는 감해졌고 우리는 용서를 받은 상태 아닙니까. 복수를 당해야 마땅한데 용서를 받았으니까 그 감사하는 모습이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종말론적 삶이고, 이것이 유일한 경건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주의 말씀과 주님과의 교제를 우리는 늘 고맙게 여기죠. 자기 존재의 무게를 가볍게 가져요. 육신의 무게는 70Kg이라도 내 영혼의 무게는 0이 되어야 합니다. 텅텅 비어있어야 해요. 그런데 왜 텅 비지 못하느냐? 그것은 바로 이웃(타인) 때문에 그래요. 타인의 목소리, 타인의 욕망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는 적어도 이런 수준은 되어야 해.”라는 기대가 있으면, ‘네가 그렇게 기죽어 살 필요 없이 당당해라.’ 라고 하면서, ‘당당하려면 적어도 이 정도의 위치는 올라야 돼.’ 이런 생각이 들고, 그 때부터는 갈등이 일어나지요.
그런데 고맙게도 성령께서 개입하셔서 내 욕망과 성경 말씀의 차이를 깨닫게 해서 새롭게 내 자리를 확인토록 하시지요. 이것이 바로 경건이 됩니다.
그 다음 14절을 봅시다.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장로의 회에서 디모데가 안수를 받았는데, 그러면 그 장로 회의 그 권리는 누가 준 것입니까? 여기서 은사라는 것은 장로 회가 주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장로 회라는 것은 지나가는 하나의 매개체지요. 단 조건이 있어요. 그 때 장로 회의 모임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안수를 받게 되는데, 그러면 그 안수 준 사람이 사적으로 아까 14가지의 감독에 대한 이야기 중 1가지가 미흡했을 경우에 그 사람이 주는 안수는 유효한 것인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지요.
성령의 은사가 인간을 거쳤다고 그게 무효로 끝나는 성령의 은사가 있겠습니까? 없지요. 왜? 어차피 인간은(어떤 장로도)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을 통과해서 은사가 주어지기 때문에 반드시 장로 회는, ‘우리 장로 회가 은사를 줍니다.’ 라고 하면 안 되고, ‘은사는 우리가 주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주십니다. 우리는 그냥 도구에 불과합니다.’ 라는 멘트를 장로 회에서 날려야지요.
목사를 안수할 때 오른 손으로 하느냐, 왼 손으로 하느냐? 그것은 문제가 안 돼요. 비빔밥 만들 때 왼손으로 하든 오른손으로 하든 잘 비비면 맛있게 먹을 수 있어요. 성경 말씀에 죄인들이 동원되어서, 죄인은 어디까지나 죄인일 뿐이고 ‘너도 똑같이 사랑 없으면 못 살아.’ 그런 것을 서로 고백하면서 주의 은사가 드러나는 그것이 바로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보시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2011 여름수련회 8강
디모데전서 5장을 보겠습니다.
1절 이하에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 하고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참 과부인 과부를 경대하라.”
이렇게 하면 뭘 얻는다는 말입니까? ‘교회가 은혜롭다. 교회가 부흥된다.’ 이런 것을 위함입니까?
종말에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오류, 소위 지도자가 범할 수 있는 오류에 대한 지적입니다. 지도자로써 말씀을 가르친다고 늙은 사람을 꾸짖고, 젊은 사람을 함부로 대하고 이런 것이 있을 수 있단 말이지요. 이것은 디모데 개인을 포함해서 이 계시를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적용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이상적인 교회나 이상적인 공동체를 이루겠다는 그런 의미는 아니고, 주님께서 살아계실 때 어떤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사셨는가를 교회에서 나타내고 보여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종말을 모르는 일반 사회에서 이러한 가족윤리나 사회윤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들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선을 베풀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동양철학에서는 개인문제로 봐요. ‘나쁜 사람은 악을 행하고 착한 사람은 선을 행한다.’라고 보통 생각하는데, 여기서 좀 더 깊이 들어가서 ‘나쁜 사람과 선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한 사람의 마음속에 선한 마음도 있고 악한 마음도 있다.’고 합니다. 세석이라는 사람이 이런 주장을 했어요.
여기에 대해 맹자는 ‘선한 마음, 악한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물고를 선한 방향으로 틀면 선하게 되고, 나쁜 방향으로 틀면 악한 결과를 낳는다.’는 거예요. ‘타인에게 어떻게 선을 베푸느냐 하는 문제에서 개인의 성향과 자질을 어떻게 갖추면 선이 나오겠는가? 사회적으로 선한 사회가 되는가?’ 그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선한 쪽으로 물고를 틀려면 결국은 개인 문제가 아니고 환경문제가 됩니다. 환경에 따라 사람들은 얼마든지 선할 수도 있고, 나쁜 환경에 빠지면 나쁜 짓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교육을 맹자의 모친이 실천했지요. 좋은 학군을 위해 강남으로 이사하는 것은 옛날 맹자 엄마가 한 일입니다. 시장 근처에서, 무덤 근처에서, 서당 근처로.
아이들은 자기가 본대로 행동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선한 것을 보여주면 선하게 되고, 악한 것을 보여주면 악하게 되는 것이지 인간 자체에서 선과 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에 반대해서 순자라는 사람은 이런 주장을 합니다. 사람은 날 때부터 악해서(이것을 ‘성악설’이라 함.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 채찍질 하고, 가르치면 된다는 것입니다. 많이 채찍질하면 좋은 사람이 되고, 방치하면 악한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이런 철학자들이 이웃에게 선을 베풀려는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예수님을 사랑해서? 아니에요. 그러면 뭐냐? 현재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공동체를 평화롭고 살기 좋은 환경으로 만들어서 자신이 행복하게 살려는 이기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겁니다.
불교 쪽에서는 인간의 마음이 행동을 결정한다고 봅니다. 이 말이 맞습니까? 아니에요. 인간의 마음은 자기 소유가 아니에요. 그런데 불교에서는 ‘내 마음은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다르다.’라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나중에 동양철학에서 굉장히 큰 논쟁이 벌어집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충동이 우선인지, 아니면 이성이 우선인지? 보통의 철학자들은 ‘정신 바짝 차리면 바르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해야 정신 바짝 차리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이 가스관 타고 올라갈 때 정신 바짝 차리면 도둑질 할 수 있습니다. 컨닝할 때에 정신 바짝 차리면 감독관 눈을 피해서 컨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학설이 있어요. ‘정신 차리면 된다.’는 것이 맹자 쪽입니다. 맹자는 인간이 선하기 때문에 열심히 하면 착한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반대편에 선 사람은, ‘인간에게는 칠정(희, 노, 애, 구, 애, 오, 욕)이 있고, 욕망이 있는데 그 욕망은 정신 바짝 차려서 다스려야 된다.’ 정신을 안 차려서 나온 것이 충동과 감정 이런 것인데, 이것을 나쁜 것으로 봅니다.
충동이 다 나쁜 것입니까? 선심을 쓸 때 이 마음이 나쁘다고 볼 수 있습니까? 뭔가 구제하고 싶은데 이것저것 따질 때 문제가 더 크잖아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주님 주신 마음으로 그냥 내면 되는데, 부부가 서로 얼마를 낼 것인가로 고민하다가 결국은 둘 다 죽었어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어떻게 보는가 하면, 신수라는 사람은 ‘보리수같은 이 마음을 갈고 닦으면 그 갈고 닦는 행위만으로도 남에게 선한 향기를 낼 수 있다.’ 라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혜능이라는 사람은 ‘닦을 마음이 없는데 뭘 닦는단 말인가?’ 라고 했어요. 마음이 없어야 되는데 나에게 마음이 있다고 여기는 자체가 더러워진 것으로 보지요.
원효라는 사람은 ‘인간으로써 어떻게 하면 선을 행할 수 있을까?’ 이것을 고민했어요. 동양의 도 닦는 사람들이 인간적인 면에서 굉장히 순수해요. ‘내 일신이 어떻게 하면 편할까?’ 하는 것은 짐승같은 생각이라고 여겨요. 처음에는 짐승 같아도 도를 닦으면 ‘어떻게 하면 남을 위해 살까?’ 이렇게 되고, 이것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윤리가 되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뭘 이야기했습니까? ‘네 원수를 사랑하라.’ 예수님도 이런 말씀을 하셨지만 바리새인도 이런 말을 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의가 바리새인과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하셨지요. 이 말은 바리새인을 물 먹이는 말씀입니다. “기껏 생각한 것이 그 정도야?” 이런 말이지요. 바리새인의 행동에 대해 “수고했어!” 라고 하시고는, “너희들은 지옥 간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죽도록 일하고 지옥으로 간 사람의 대표로 바리새인을 거론하신 겁니다.
바리새인이 지옥 간다면 바리새인의 삶을 존경하면서 따라가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은 줄줄이 다 지옥으로 가겠지요.
그러니까 성경 말씀에서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받은 사랑만이 사랑을 알아보고 그것만이 주께서 원하는 성도의 삶입니다. 그 사랑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죄밖에 나올 것이 없다고 고백하는 그 사랑이 진정한 교회로써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합니다.
어쨌든 원효라는 사람은 그 당시에는 ‘어떻게 선을 베풀까?’ 고민하다가, 깨달음을 위해서 중국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길을 가는 도중에 밤에 지치고 목이 말라서 길에서 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셨습니다. 예전에는 물맛이 그렇게 좋은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해골바가지에 담긴 빗물을 지난밤에 마신 거예요.
낮이었다면 그 물을 마셨겠습니까? 못 마셨겠지요. 결국 나에게서 나오는 선입관이 세상을 잘 못 판단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는 겁니다. 물 한 그릇 먹고 놀라운 것을 깨달았지요. 그래서 유학 가는 길을 중단하고 돌아왔습니다. 유학이 문제가 아니고 내 마음의 번뇌가 문제인 것을 깨달았기에.
번뇌가 있으면 고통이 온다고 불교에서 주장하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고통을 제거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을 도와준다는 것은 고통 중에 있는 자들에게 말 몇 마디 던지고 그들의 고통을 해소해 주는 거예요. 이것이 그들의 포교입니다.
마음의 번뇌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에 이미 번뇌가 있으니까 내 마음의 번뇌를 지우면 그것이 해탈이니 굳이 당나라까지 유학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요.
원효와 같이 당나라 유학을 떠난 사람이 있었어요. 의상이란 분인데 이분은 해골바가지로 물을 안 마셨기에 그냥 유학을 갔습니다. 이 사람은 유학을 가서 화엄경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해탈하는 그것조차도 전체 중에 일부에 불과하다.’ 전체가 중요하지 개인이 중요하지 않다는 거지요.
원효와 의상 둘 중 어느 것이 더 바른 진리입니까? 소위 이러한 인간이 내놓을 수 있는 모든 해탈, 그들이 말하는 선이 무엇입니까? 내가 소속되어 있는 이 자연 질서를 안정되고 평온하게 만들 수 있도록 자체적으로 지혜를 끄집어내는 것이 바로 동양철학이죠. 그렇다면 이 동양철학을 오늘날 교회에서는 어떻게 써먹겠습니까? 교회를 폐쇄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여러분들이 다니는 교회가 평화롭기를 원하고 부흥되기를 원하지요? 교회가 날 위해 무엇을 해줄까를 기대하지 말고, 내가 교회를 위해 뭘 할까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라는 동양철학 사상이 그대로 디모데전,후서를 가지고 동원되지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동원되는지 봅시다.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이것이 아니고, “교회 다니는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이렇게 되겠지요. 왜? 그래야 내가 다니는 교회는 평화로운 교회가 되니까. 설교 참 쉽지요? 그래서 디모데전,후서를 ‘목회 서신’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목회 서신’은 없습니다. 전부 주님의 심판과 구원에 관한 이야기, 주 예수님이 행하신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늙은이에게 어떻게 다가가겠어요? 그 사람의 나이를 보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 사람들을 대하는 그 구조에 물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는 조직 구조지요. 조직이 우선이고 구성원들은 조직보다 뒤로 밀립니다.
늙은이든 젊은이든 간에 그들이 복음을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감사와 사랑이죠. 주님 뜻은 ‘늙은이들은 대접 받아라.’ 이것이 아니고, 진정한 늙은 분들은 사랑이 뭐고, 감사가 뭐며, 희생이 뭔지를 아는 거지요. 그렇다면 젊은 분들은 그분들의 그 사랑과 희생을 어디에 초점 맞춰야 됩니까? 현재 지금 내가 소속되어 있는 곳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이런 구조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신 사랑을 만끽할 수 있는 기회를 그들은 서로 갖게 된다는 말이지요. 이것을 하나님의 ‘은사’라고 하는 겁니다.
디모데후서에 1장 6절에 보면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라는 말씀이 나와요. 그러면 은사의 마지막은 뭐가 나옵니까?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지요.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 일은 사랑이라.” 그러니까 이 말은 뭐든지 사랑에서 흘러나와서 사랑으로 다시 되돌아가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사랑’이 무엇인가? 사랑은 자기 자신을 비우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동양철학 같기도 하고, 불교 같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 사랑의 출처를 내가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온유하고,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이 사랑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 된다는 겁니다.
그 사랑이 경과하는 그 절차 모든 과정에서 사랑은 어떻게 흘러가는가? 이것을 좀 설명하겠습니다. 이것을 설명하면 우리는 비로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든 행적에 대해서 그 비밀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적을 보면 사랑이 흘러가는 골을 만들어요.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사랑을 주고, 사랑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영구적으로 피해버림으로 주님의 사랑의 가치를 우리에게 부각시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어떤 과부가 너무 억울한 일이 있어서 재판관을 찾아가서 간청합니다. 그런데 재판관은 귀찮아하면서 과부를 돌려보냅니다. 그런데 계속 찾아와서 간정하니까 재판관이 그 간청을 들어주지요.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눅18:8)”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의 초점은 간청하는 과부가 아닙니다. 재판관에게 초점을 맞춰야 됩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간청하니까 들어주는데 이 마지막 때에 우리 주님이 우리의 간청을 어찌 들어주지 않겠는가?’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 간청한다는 것은 뭡니까? 재판관이 불쌍한 과부를 챙기는 이유가 ‘네까짓 것 때문에 내가 더 이상 귀찮을 수 없다.’는 투지요. 그러면 주님 되시는 재판관이 불쌍한 우리를 도와준다는 말은, 높은 자리에 계신 주님이 낮아짐으로 같은 눈높이에서 그 간청을 들을 정도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한다는 그런 내용이에요. 모든 예수님 말씀이 다 그렇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면 응답하신다는 내용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주님 사랑으로만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저주밖에 주어질 것이 없습니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습니다. 헌금을 하든 기도를 하든 내가 주님께 받칠 것은 없습니다. 죄짓는 이 몸 뿐입니다.”라는 모습일 때 그것이 사랑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주님 사랑과 매치가 되는 하나의 대상자가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연기를 해서 초췌한 척하고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이 세리, 창기, 거지 나사로 등을 예로 들어서 현재 너희들이 평소에 추구하는 그 본질과 전혀 다른 쪽에 주님의 사랑이 임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제자들끼리 싸움이 벌어졌어요. 우리 중 누가 높은 자인가 하는 것 때문에. 그 때 주님이 어린 아이를 한 명 데려왔어요. 그러면 그 아이는 구원 받습니까? 그게 아니고,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지요.
어린이는 스스로 자기의 것을 챙길 수 없는 자입니다. 자기 것이 없으니까 사랑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적당한 거예요. 제자라는 자리가 주님 따라다니면서 주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증거하는 것인데 이들은 서로 자기의 받은 사랑이 더 크다고 경쟁하고 있어요.
어린아이같이 되라는 말은 자기의 것이 아무것도 없어야 천국에 합당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제자들은 천국 못 갔습니까? 아니지요. 십자가의 영이 임하면 어린아이가 못되는 나를 사랑으로 어린아이 되게 만드시는 그 솜씨를 사랑의 은사로 주십니다. 사랑의 은사를 받으려고 하지 마시고 주신 사랑이나 받으세요. 이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자는 이미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그런 겁니다.
다음에 6절을 봅시다.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쾌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살았으나 죽었다고 하지요. 그러면 이것을 1절과 결합시켜 봅시다. 일락을 좋아하는 늙은이는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죽었지요. 그런데 ‘일락을 좋아하는 늙은이를 꾸짖지 말라.’ 이 말은 가만히 놔두란 말입니까?
이 성경 말씀을 질서 잡기 위한 법 조항으로 삼지 말고 주님의 취지는 항상 ‘디모데야, 제발 좀 마음을 낮춰라.’는 것인데, 마음을 낮추고 이야기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 사랑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거예요. 물론 그 사랑을 받고 구원 받을지 여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어쨌든 사랑으로 다가설 수 있는 하나의 기회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성령의 은사를 받으면 마음을 낮출 수가 있습니다.
8절에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가 예수 믿으면 구원 받습니까? 자기 친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예수 믿어도 지옥 갑니까? 만약 디모데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면, 디모데는 “사랑의 은사를 받았습니까?” 라고 되물을 거예요. 사랑의 은사를 받으면 지금은 안 돌봐도 다음에는 돌볼 수도 있어요.
돌본다는 것이 매월 생활비 얼마를 주는 것이 돌보는 겁니까? 아니면 월 몇 번 찾아가야 합니까? 지금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1년에 2회 찾아가는 사람들도 많아요.
만약 이 말씀을 교회 앞에 붙여놓으면 예수 백날 믿어도 소용없어요. 친족을 돌보지 않으면 지옥가요. 그러니까 이 성경 말씀을 사랑이라는 바탕으로 보아야 한다고 지금까지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성령의 은사가 여러분에게 오게 되면 그것을 우리가 마음대로 빼도 박도 못합니다.
나는 매주 부모님 찾아가고, 자주 용돈을 드린다면 그것이 가족을 돌보는 것입니까? 십자가는 어떤 행위로 규정된 것이 아니고 그 마음이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떤 완벽한 행동을 해도 그것이 완벽한 행동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 어떤 행동을 해도 그것이 아름다움이 될 수가 없어요. 우리의 행동은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건 십자가 앞에서 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을 낮춰야 합니다.
이런 마음 낮춤을 통해 가족을 돌볼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면 사랑으로 돌볼 수밖에 없지요. 이것이 믿음의 모습입니다.
그 다음 14절을 봅시다.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여기에서 젊은이는 젊은 과부를 말합니다.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11절에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시집 갈래, 천국 갈래?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거예요. 시집가는 것이 지옥 가는 겁니까? 시집가면 믿음을 배반한 거예요?
여기서 말하는 것은, 종말의 삶에 있어서 은사가 없는 사람들은 교회 오더라도 노림수를 가지고 딴 데 정신 팔려서 오는 거예요. 이런 사람은 결국 자기의 본 자리 사단에게로 돌아가요. 그것이 젊은 여자의 경우는 이렇고, 늙은 사람은 이렇고 그것이 각각 다르지만, 교회를 그렇게 사람의 쾌락이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그런 장소로 생각한다면 다시 생각해 보라는 식으로 말씀하신 겁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이에요. 이것은 함부로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어요. 그런데 역사적 존재로서의 교회는 들어왔다 나갔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교회는 역사적 존재와 묵시적 존재가 만나는 지점, 십자가의 사랑이 피어나는 곳이죠. 이것이 새언약입니다. 새언약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효과를 드러내게 하는데, 그것을 위해 우리는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 이 말씀을 보고, “아, 우리가 얼마든지 이런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구나!”라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면 또 다시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을 증거하는 계기로 말씀을 활용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특정 인간을 지옥 간다, 천국 간다고 하지 마시고 우리도 늘 그런 마음이 될 수밖에 없는데 성령께서 날마다 우리 속에 박혀서 이 말씀을 되새기게 하는 거예요.
‘교회를 너무 세상적인 즐거움을 주는 단체로 생각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교훈을 얻게 되는 겁니다.
그 다음 18절 봅시다.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이것이 고린도전서 9장에도 나와요. 고린도전서에서는 전도자에게 생활비를 제공하라는 말씀이지만, 여기서는 19절이 주가 돼요.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왜 장로한테는 두 세 증인이 있어야 됩니까? 장로는 당시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에게는 모함 같은 것이 올 수가 있어요. 그래서 확실한 증인이 있어서 누가 봐도 납득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납득이 되더라도 함부로 그렇다고 결정해서도 안 돼요. 왜냐하면,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라이벌로 여기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것은 그 지도자의 자리가 시기 나서 그럴 수도 있고, 지도자의 말로 상처받아 그럴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 지도자는 미움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앞에 선 사람은 여러 가지 눈총을 받는 입장이어서 본의 아니게 오해를 받고 감정적으로 모함을 당하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이럴 경우에는 여러 사람을 증인으로 세워서 정말로 그러한가, 고소한 사람의 말이 맞는가를 잘 들어보고 판단을 내리는 것이 옳아요.
어느 누구도 사람들에게 변명할 수 있는 자격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변명하나 마다 십자가 앞에서 죄인인 것을 온 천하가 다 아는 거예요. 십자가 앞에서 죄인인데 그것을 변명한다고 죄인에서 좀 더 나은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다만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인격과 품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전하는 말씀이 중요하기 때문에 말씀의 신뢰도가 그런 모함으로 가로막힐 수가 있어요. 그러면 그것은 사단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 대한 불신 때문에 말씀을 의심하고 듣는 분위기가 되면 그 의심이 말씀 자체를 가로막는 것이 됩니다. 어떤 인간도 변명의 여지가 없어요. 고발자가 말한 것이 사실이냐, 아니냐와 상관없이 죄인이에요. 그래서 변명한다고 해서 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고발자가 고발한 것보다 더 많은 죄가 있어요.
보통 고발자가 지도자를 고발하는 이유는 지도자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보다 전도자의 말이 자기 마음에 안 들고, 자기에게 상처를 준 것 때문에 미워서 고발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제 6장을 봅시다.
1절에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 본문도 어려워요.
돈 주고, 돈 받는 관계라면 공경하지 말래도 공경합니다. 왜? 잘리면 밥 먹고 살기 힘들기 때문에. 따라서 아랫사람이 상전을 공경하지 않는 경우는 돈 문제보다도 영적 상태나 세상적인 실력이나 윤리, 도덕적으로 자기보다 못하다고 무시할 경우에 해당됩니다.
그렇다면 아랫사람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나님, 저 사람은 인간적으로 나보다 못한 사람인데 왜 나의 상관이 되어 있고 나는 그의 아래에 있어야 됩니까?”라고 하나님께 대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아래에서 서러움을 받는 입장이 되면 그런 오만과 자만을 낮출 수가 있어요.
억울한 곳에 갈 때 비로소 남이 나를 칭찬할 때 고마운 줄 알지, 마땅히 자기는 칭찬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칭찬 안 해주면 그 사람이 미워지는 수가 있습니다. 늘 마음을 낮춰서 아래쪽이다 생각하고 누가 칭찬해 주면 ‘감사합니다.’ 생각해야 되지, ‘나는 이만큼 수고하고 애섰기 때문에 마땅히 칭찬 받아야 돼.’ 이렇게 나온다면 그 사람은 자기 상전의 단점만 보이고 항상 지적하고 시비를 걸 사람입니다.
아예 회사 다니는 재미를 상전 공격하는 재미로 사는 사람도 있어요. 자기보다 못한 자가 자기 상전이 된 것에 대한 불만과 시기, 그로인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늘 불평하고 욕하고. 이것은 진급 못한 자신을 동정하고 있는 겁니다.
높은 자리, 낮은 자리라는 이런 세속적인 것에서 구원 받으려면 예수님처럼 낮은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으면 그 자리가 얼마나 복된 자리인 줄 깨닫게 됩니다.
2절에 보면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니라.”
사랑을 늘 하나님께 받고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라고 경히 여긴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형제라고 해서 경히 여기지는 안잖아요. 오히려 반갑고 고맙고 더 조심스럽지요. 결국 형제라고 경히 여긴다는 것은 인간성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겁니다. 같은 교회 성도니까 친한 것은 좋은데, 직장에 가면 상관이면 상관답게 대우해야 되는데 자기 동료처럼 대하면 안 되지요. 그것은 직책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에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존중해 줘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 4절을 봅시다.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항상 글을 쓸 때 내용이 있어야 돼요. 성질 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글의 내용이 있으면 그 내용이 귀해서 좀 성질 나는 글이라도 그것은 남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그 사람을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진린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는 식으로 봉사하는 입장에서 글을 쓰고, 이야기 할 때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 대목에 대해서 잘 모를 때,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해서 말한다면, 소년 시절부터 철공소에서 일만 한 사람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 때는 상대가 말하는 것을 가만히 들으면 돼요. 그런데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해 안다고 해서 네가 나보다 더 낫다고 생각 하냐? 그래 너 잘났다.” 이렇게 나오면 아무 내용이 없는 거예요.
교회에서 어떤 집사님이 “이 옷 짠다고 고생 좀 했습니다.”라고 하면, 뜨개질 하는 절차나 방법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되는데, “그래, 너 잘났다.” 이렇게 나오면 아무 내용이 없잖아요. 이렇게 되면 쓸데없는 논쟁만 일어난다는 겁니다.
5절에는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내용은 없고 자기만 살아 있으니까 다툼이 일어나는 겁니다.
7절에 보면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얼마나 낮아져야 됩니까? 있는 것 다 버릴까요? 버리지 마세요.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구나. 죄 밖에 나올 것 없는 나에게도 주께서 복음 전하라고 이런 것들을 주셨구나.” 라고 하면서 자족하고 감사하는 마음. 그것이 우리 속에 계신 성령께서 주신 마음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