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빠진 십자가
밤이나 낮이나 물컹물컹하게 손에 잡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육체 덩어리뿐이다. 그런데 옆집 아들이 어제 밤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시 한 번 내 몸을 만진다. 역시 물컹물컹한 내 육체 덩어리에는 아무 이상 없다. 비록 옆집 아들이 죽어도 내 몸에는 아무 이상 없다. 그러면 됐다. 그러면 모든 게 정상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교회 설교 시간에 들었다. 그 자리에 앉아서 내 육체를 만져본다. 역시 물컹물컹하다. 아무 이상 없다. 그러면 됐다. 모든 게 정상이다. 목사는 외친다. “십자가 피를 믿으시면 죽어도 천당 갑니다”고. 무슨 뜻일까?
지금 나에게 아무 이상 없는데 왜 저 목사는 왜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저토록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외치는가? 이 현장에는 지금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은 물컹물컹한 각자의 육체들뿐인데 도대체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그 쪽 이야기만 하는가?
바르게 살자는 이야기인가? 서로 사랑하자는 이야기인가? 남을 존중해주자는 이야기인가? 화목한 교회를 만들자는 이야기인가? 어려운 사람에 관심 갖자는 이야기인가? 죽어서 들어가야 될 천국에 소망을 두자는 이야기인가? 간절한 기도가 효능을 보인다는 이야기인가? 전도 많이 해서 넓은 자리를 다 채워보자는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이 물컹물컹 손에 집히는 이 육신을 가지고 성의를 가지고 짬짬이 봉사할 용의가 있다. 그러나 목사가 말하는 십자가 피는 그런 요구를 말하는 것 같지 않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에게 뭇매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때 그 인간들에게 맞아 죽은 그 분이 지금 우리 모임에 합석해 계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물컹물컹한 인간들의 육체의 힘에 의해서 피 쏟으시고 돌아 가셔야 했는데 글쎄 그분이 되살아나 지금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인들은 타협을 요청한다. 즉 십자가는 믿되 그 분이 우리 가운데 계신 것을 인정 못하겠다는 것이다.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요 20:24-25)
즉 사람들은 지금 살아있지도 않는 예수님을 제켜놓고 이야기하자는 주의다. 살아있는 인간들끼리만 이야기하고 의논하자는 주의다. 어떻게 하면 서로 사랑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인격적인 대접을 최대한도로 제공할 수 있을지, 희생과 봉사의 분량을 어떤 식으로 배분하면 교회가 원만하게 말썽이나 불평 없이 운영될 수 있을 지를, 오로지 눈에 보이는 인간들끼리만 현실로 인정해서 의논해보자는 것이다.
혹시 서로 실수 한 것이 발견되면, 십자가라는 특별 조제약이 준비되어 있으니 그것으로 처리하면 하늘의 용서까지 이끌어낼 수 있으니 우리 인간들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니란다. 어쨌든 서로의 존재 가치를 인정해주고 고된 삶을 격려해주고, 스치기만 해고 사랑이 폴폴 나오는 그런 이상적인 교회로 멋지게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예수님이 실제로 만약 우리 가운데 계신다면? 그리고 여전히 못자국과 창자국을 앞장세우시면서 자신의 죽으심을 내미신다면? 과연 인간이 그 분 앞에서 해야 될 발언은 무엇인가? 오직 “주여!” 뿐이다.
물컹물컹한 자신의 육체의 가치는 안중에서 없다. 오직 “주여!” 뿐이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8-29)
도대체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보지 못하고 믿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바로 인간들에게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버림받은 그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의미이다. 이제부터 사람들을 상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입장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세상을 향해 이야기할 거리가 늘 생기게 되었다는 말이다.
나 때문에 죽으신 예수님을 만나놓고도 다시 떠밀어내지는 말자. 성도된 자의 빈자리는 사람의 정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피로만 채워져 ‘피의 사람’으로 영원히 예수님과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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