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기와 생령 이야기
앞서 우리는 창세기 1장의 사람과 2장의 사람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창세기 1장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어진 하늘에 속한 사람이고, 창세기 2장의 사람은 흙과 생기로 지어진 땅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흙과 생기로 지음을 받은 아담을 생명과를 먹어서 영생하는 자가 되라고 한 것은 아담은 앞으로 영생하는 자로 지음을 받은 자이지, 영생하는 자는 아니란 것도 상고해 보았다. 즉 아담은 생명과를 먹고 영생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자로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2장의 흙에서 난 사람은 창세기 1장의 말씀으로 난 사람을 겨냥하여 지음을 받은 인간이라는 것으로 살펴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1장은 성경전체의 내용을 담아 놓은 목차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의 실제 내용은 창세기 2장부터 시작이 되어진다는 말이다.
성경은 흙에 속한 사람이 생명과(예수님)를 먹고 영생하는 하늘에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을 중심 이야기로 말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창세기 2장에서부터 인간의 역사는 시작이 되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 사실을 추적해 보자.
창세기 2장 4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고 하신다.
여기서 "대략"이라는 '톨도트'라는 히브리어는 호크마 주석에서 '후예', '자손', '계보', '역사' 등 다양한 해석을 하고 있다. 70인역에서는 마태복음 1장 1절에서는 '비블로스 게네세오스' 라고 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할 때 세계로 번역이 되었다. 즉 "족보"란 말이다. 이 단어는 문자 그대로 족보며 후예다. 땅의 사람들이 생성되고 이어져 내려간 족보와 하늘의 사람들이 나타나고 살아간 족보이다.
우리는 이 두 족보 가운데 어느 곳에 이름이 올라 있는가? 이것이 우리의 관심사이다. 그러니 창세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한 순간에 창조된 우주의 삼라만상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대(代)"(generation)를 거듭하며 이어가는 인간들의 이야기라는 말이다. 즉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땅의 아담들의 이야기와, 흙에서 났지만 생명과를 먹고 하늘로 돌아가는 아담들의 이야기라는 말이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아담을 지으시고,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라고 말씀하신 것 자체가 이미 인간은 생명과를 통해서 구원을 얻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는 말이다. 그러니 창세기 2장의 아담은 흙으로부터 벗어나는 삶이 없으면 필경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한계를 품고 있는 존재이다.
구원이란? 흙에 속한 아담이 생명과를 통하여서 하늘에 속한 아담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죄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즉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지 않음이라 하겠다. 땅에 속한 자가 하늘에 속한 자로 나아가지 못한 것이 악이고 죄인 것이다. 자! 그렇다면 창세기 2장의 아담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를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이는 아담을 어떤 존재로 보느냐에 따라서 성경의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창세기 2장 7절에서 말하는 아담이 어떤 존재인지를 각각의 성경 번역본으로 살펴보자.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표준새번역)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공동번역)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현대인 성경) "그때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티끌로 사람을 만들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산 존재가 되었다"
(원어번역성경)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서 취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된지라"
다양한 번역들을 제시하는 것은 각 번역들이 이 부분을 바라보는 시각이 저마다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개역 성경이 바라보는 아담은 "생령(生靈)"으로서 이미 영적인 존재로 보고 있다. 그러나 다른 번역들은 아담을 영적인 존재로 취급하지는 않고 있다.
공동번역은 그냥 "사람"으로, 현대인의 성경은 킹제임스 버젼과 비슷한 "산 존재"로, 표준새번역과 원어번역성경도 "생명체"로 묘사하고 있다. 개역 성경은 분명히 이 아담을 영적인 존재로 보고 있으며 여타 번역들을 문자적으로 본다면 아담을 영적인 존재로 단정하지는 않고 그냥 "살아있는 존재" 정도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흙과 생기로 지어진 아담의 상태가 어떠했나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아담이 처음부터 영적인 존재였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았느냐의 차이는, 그 이후에 벌어지는 아담의 타락과 구속, 영생의 문제와 바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우리가 고민해야할 문제를 성령은 바울을 통하여서 해석을 해 주고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을 보면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라고 한다.
(New KJV) And so it is written, "the first man Adam became a living being." The la
st Adam became a life-giving spirit.
(헬라어 원문) ou{tw" kai; gevgraptai, Egevneto oJ prw'to" a[nqrwpo" Ada;m eij" yuch;n
zw'san, oJ e[scato" Ada;m eij" pneu'ma zw/opoiou'n.
성령이 바울을 통하여서 해석케 한 것은 여기서 첫 아담은 "산 영"이고,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라고 한다. 언뜻 보면 두 아담 모두 영적인 존재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킹제임스 버젼이 보여주고 있는 대로 첫 아담은 단지 "살아 있는 존재"(a living being)였고,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a life-giving spirit)이라는 점이다.
분명히 사도 바울은 두 아담을 묘사하면서, 하나는 영적인 존재로 또 다른 하나는 영이 아닌 그냥 살아 있는 존재로 기술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처음 아담을 창세기 2장 7절이 말하는 아담을 말하고 있고, 마지막 아담은 예수님을 말하고 있다.
바울의 해석을 빌리면 하나님이 흙과 생기로 지은 생령인 아담은 히브리어로 "네페쉬 하야"인데, 이것을 킹제임스 번역은 "리빙 빙"(a living being)으로, 70인역은 "푸쉬켄 조산"(yuch;n zw'san)으로 번역하였다. 즉 "네페쉬 하야"를 헬라어로 번역한 "푸쉬켄 조산"은 분명히 "프뉴마"(pneu'ma)가 의미하는 영과는 다른 의미이다.
사도 바울이 70인역의 번역을 그대로 인용한 것은 자신이 보기에 첫 아담은 영적인 존재가 아닌 즉 그냥 "산 존재"라는 "리빙 빙"(a living being)의 상태였다는 것을 지지한다. 생령이라는 "네페쉬 하야" 라는 히브리어의 뜻도 영적인 개념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이 단어는 창세기 1장 20절과 2장 19절에서 말하는 "생물"을 말할 때도 동일하게 "네페쉬 하야" 라고 하였다.
이들 생물들은 흙으로 만든 각종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며, 물 속의 물고기들을 포함한다. 즉 "네페쉬 하야"는 사람에게만 사용된 것이 아니고 모든 들짐승과 새,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두루 사용되었다. 다만 아담과 짐승이 다른 점은 아담에게는 생기가 주어졌지만 짐승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생기 역시 영적인 개념은 아니다. 만약 "네페쉬 하야"인 사람을 영적인 존재로 본다면 동일한 "네페쉬 하야"인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도 영적인 존재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보아도 짐승을 영적인 존재로 보고 있지 않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창세기 2장 본문에서 생령인 인간이 영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자증해 주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라고 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영적 존재란? 하나님과 같이 영생하는 자를 말하는데 "네페쉬 하야"인 아담은 분명하게 영생하는 자가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반드시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라고 명령을 하신 것이다. 결국 처음 아담은 흙으로만 지음을 받은 짐승과는 달리 흙에다 생기를 담고 있는 존재로서 짐승보단 조금 나은 존재인 생령인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짐승과 같이 생물인 네페쉬 하야일 뿐 영적인 존재가 아닌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왜? 아담이 생명과를 먹고 영적인 존재로 거듭나야 하는가? 이는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영이신데(요4:24) 그와 같이 살아갈 아담이 영이 아니면 하나님과 함께 살아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겐 짐승에겐 주지 않은 생기를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짐승에겐 없는 생기란 무엇인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불어 넣어준 "생기"는 히브리어로 "니스마트 하임"이라고 한다. "니스마트 하임"이란 말은 히브리어로는 두 단어이다. 즉 생명을 의미하는 "하임"이라는 말과, 바람이나 호흡을 의미하는 "네솨마"를 연결해 놓은 합성어이다. "니스마트"는 "네솨마"의 구성형(연계형)으로서 하나의 명사가 구성형이 되면 그 뒤에 오는 단어에 소유격 개념이 붙는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즉 이 경우에는 "생명의 바람"이나, "생명의 기운"이라는 개념이 된다. 그러므로 생기인 "니스마트 하임"은 생명 그 자체는 아니란 말이다. 앞서서 "네페쉬 하야"가 영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져 "산 존재"라는 것을 살펴보았듯이 "니스마트 하임"이라는 생기 역시 영적 생명은 아닌 것이다.
아담에게 불어넣어진 생기 즉 "니스마트 하임"은 에스겔 37장 5절에 나오는 "생기(루아흐)"와도 다르다. 만일 아담이 받은 생기가 에스겔서에 쓰인 "루아흐"였다면 아담의 본질이 영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루아흐"가 바로 헬라어로는 "프뉴마"(pneu'ma), 영어로는 "스피릿"(spirit), 그리고 우리말로는 "영"을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 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신"이라는 단어가 바로 이 "루아흐"이다. 그러나 아담에게 넣어진 생기는 1장 2절의 하나님의 신인 "루아흐"와는 전혀 다른 "네솨마"이다.
생명의 기운 즉 "니스마트 하임"은 아직 생명 그 자체는 아니고, 생명으로부터 나온 어떤 기운, 생명을 감지하고 생명을 알아볼 수 있는 어떤 능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즉 생명과 속에 영생이 있다는 것을 감지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하겠다. 짐승과 인간이 다른 점은 짐승은 생기가 없으므로 생명을 감지할 능력이 없고 인간은 생기가 있어서 생명을 감지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생을 알아보는 능력을 가진 자는 생령이고 영생을 알아보는 능력이 없는 자는 짐승인 것이다.
잠언 20장 27절에서는 "사람의 영혼(니스마트)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고 하였다.
잠언 저자가 바라보는 사람의 "니스마트"는 여호와의 등불로서,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즉 생명을 알아보는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다시말해서 생명을 알아보게 하는 역할을 "니스마트"가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선 생물학적으로 사람과 짐승을 판단하지만 성경은 생명을 아느냐 모르느냐로 판단한다. 이것을 신약식으로 표현하면 영생을 담고 있는 예수그리스도를 알아보는 자는 생령이고, 모르는 자는 짐승인 것이다.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라고 알아보면 생령이고, 군중들처럼 예수를 한낮 선생이나 선지자 정도로 알아보는 자들은 짐승이다. 짐승들은 떡 주는 예수로 보았지만 제자들은 생명을 주는 메시야로 보았다. 그래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나를 떠나려나 라고 물었을 때 제자들은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라고 하며 예수님 속에 생명이 있음을 알았기에 떠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제자들은 정확하게 "생기" 즉 "니스마트 하임"의 도움으로 예수님이 영생을 주는 분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예수를 따라다닌다는 것은 생령인 제자들이나 짐승인 군중들은 동일하지만 그들이 가야 할 길은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영생을 알아보는 능력을 가진 생령인 아담은 당연히 생명과를 먹고 영생의 세계로 나아가는 쪽으로 삶의 방향을 잡았어야 했다. 그런데 아담은 기껏해야 자기 수준인 여자에게 온 마음을 빼앗겨 버린 것이 화근이 되었다.
아담이 영적인 존재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면 아담은 여자에게 넋을 빼앗길 것이 아니라 생기를 통하여 인지한 생명과를 먹고 자신이 영적인 존재가 되는 일에 모든 삶의 우선순위를 두었어야 했다. 그럼에도 아담은 애석하게도 여자가 주는 선악과를 먹고 생명과에서 멀어지는 우를 범하고 만 것이다.
생기를 가진 인간이 짐승처럼 땅에서 나는 것만 바라보고 살아간다는 것은 악이고 타락이다. 아담이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은 그것 자체로 이미 타락인 것이다. 그러니 여자가 주는 선악과를 받아먹은 것은 필연적인 수순일 뿐이었다. 아담은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영적인 세계로 눈을 돌린 것이 아니고, 흙의 세계에 머물러 거기 주저앉고 만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생명나무로 가는 길은 막히고 말았다.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문을 걸어 잠그고 천사들로 지키게 하셨다.
그져 산 존재에 불과한 아담은 이젠 죽음이라는 놈에게 일평생 쫓기는 신세가 된 것이다. 아담의 목숨은 한번 죽으면 끝나는 목숨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에겐 죽음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안 죽으려고 죽음으로부터 멀리 도망가려고 한다. 그러나 죽음은 그림자처럼 항상 아담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힌다. 예수님은 이처럼 일평생 죽음에 종노릇하며 무서워하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놓아주기 위해 오셨다고 말해주고 있다.
히브리서 2장 14-16절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에덴을 쫓겨나 죽음에 쫓겨다니는 아담에게 있어 가장 급선무는 생명과가 있는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하나님은 아담이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에덴동산의 문을 걸어 잠그지 않았는가. 아담은 그저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줄 때만 기다릴 수밖에 없다. 즉 하나님의 은혜에 기댈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이제 아담이 살 수 있는 길은 살려주는 영으로 오실 마지막 아담뿐이다. 즉 살려주는 영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오셔서 살려 주어야만 살수가 있게 된다. 스스로 살수 있는 길은 없다 오직 살려주는 분에 의해서만 살아날 수가 있다.
죽음을 짊어진 채로 죽은 자로서 살아가는 아담에게 유일한 소망은 살려주는 영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자신은 죽은 자이고 에덴동산에서 쫓겨 난 것을 아는 자라면 살려주는 영만을 기다리면서 살 것이다. 마치 롯이 성문 밖에서 누구를 기다리듯이,,,,"네페쉬 하야"인 인간에게 있어 지혜로움이란? 살려 주실 분을 기다리는 것이다. 물론 대다수의 인간들은 자기가 죽은 자인 것조차 모르고 그져 땅강아지와 같이 땅에 것만 부지런히 퍼먹으며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살려주는 영으로서 마지막 아담으로 보내 주셨다. 예수그리스도 속에 영생을 발견한 사람은 구주로 영접 할 것이고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영접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그리스도 속에 영생이 있다는 것을 아는 자는 모든 삶을 예수그리스도를 쫓아가는데 진력할 것이다. 본 자는 쫓을 것이고 보지 못한 자는 그져 땅에 것을 쫓아갈 것이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땅에 것을 생각지 말고 하늘에 것만 생각하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땅에 일을 생각하는 자이고 십자가의 원수들이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지금도 수 많은 아담들은 교회에 와서도 짐승과 같이 흙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고 있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흙에 있지 않다. 흙은 짐승의 세계이며, 새와 물고기들의 세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인간에게 흙의 요소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인간은 흙의 세계와 생기의 세계를 공유하고 있는 자이다. 짐승은 오직 흙의 세계만 안다. 그래서 성경은 땅만 바라보고 사는 자들을 짐승이라고 한다. 물론 인간도 흙으로 지어진 이상 동물처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체의 행위를 한다. 그러나 인간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만 매일 수 없는 존재이다.
생명과를 먹고 영생의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 자들이다. 예수님께서 노아의 때를 악한 때라고 한 것은 그들이 흙에만 정신을 팔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종말의 모습을 노아의 때와 같다고 경고하신 것이다.
누가복음 17장 26-30절을 보면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노아 시대 사람들이나 롯의 때에 살던 사람들이 무슨 큰 잘못을 저질러서 천벌을 받은 줄 알면 곤란하다. 그들이 도적질을 하고, 살인을 하고, 나쁜 짓만 일삼고 살았다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윤리적이고 지극히 도덕적으로 살았다. 그러나 죽은 자로서 아무리 깨끗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나님이 보시기엔 시체 썩는 냄새만 풍길 뿐인데,,,.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겉으로는 한없이 깨끗하고 거룩한 척 하지만 속은 죽어 썩어 냄새가 나는 평토장한 무덤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누구나 먹었고 누구나 마셨다. 지극히 인간다운 삶을 살았다. 뿐만 아니라 노아도 장가갔고, 노아의 아들들도 결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살았고 다른 사람들은 물에 빠져 죽었다. 롯은 살았고 다른 사람들은 불에 타 죽었다. 왜? 그런가? 문제는 그들이 흙에 속한 생활밖에 몰랐다는 데 있다.
거듭하는 말이지만 신앙은 흙에 속한 삶을 아름답고 세련되게 가꾸고 영위하는 문제가 아니다. 신앙은 예수님을 먹어서 흙에서 영으로, 땅에서 하늘로 나아가는 것이다. 땅에 기운을 벗어버리고 하늘에 기운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짐승들에게 생명을 주려고 예수님을 짐승들의 밥통인 구유에 낳으신 것이다. 이 짐승들아 제발 예수를 먹고 사람이 되어서 천국에 오라고 말이다. 그런데 뉘라서 이것을 알리요,,
아담의 구원은 흙을 벗고 영을 덧입음에 있으며, 생령의 위치에서 "니스마트 하임"의 도움으로 생명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를 일컬어 히브리서 기자는 하늘에 있는 본향을 향해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다고 한다.
예수님의 책망은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말라는 얘기가 아니며, 시집가고 장가가지 말라는 뜻도 아니다. 동물들과 다름없는 흙의 세계에만 머물렀다는 지적이며, 영적인 세계, 하늘의 삶에는 무지했다는 책망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이 말하는 신앙생활이란 그가 어디를 지향하고 살아가고 있느냐이다. 마음 속에 무슨 그림을 그리고 사느냐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마음 속에 가이사의 화상을 그리고 살아가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화상을 그리고 살아가느냐이다. 가이사의 화상이 그려져 있으면 짐승이고 땅 사람이고, 하나님의 화상이 그려져 있으면 하늘 사람이다. 가이사의 화상이 그려져 있으면 가이사가 왕이고, 하나님이 그려져 있으면 하나님이 왕이다. 가이사가 왕이면 그는 가이사의 종으로 살 것이고, 하나님이 왕이면 하나님의 종으로 살 것이다.
가이사의 화상이 그려져 있는 자들은 짐승이 주는 666표를 받게 되어 있다. 이들에겐 흙이 삶에 전부이고 의미이기 때문이다. 흙이 전부인 사람은 절대로 흙을 벗어 날 수가 없다. 짐승에겐 떡이 양식이지만 사람에겐 말씀이 양식이다.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너는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 지니라고 저주하셨다.
뱀의 후손은 종신토록 흙을 떠날 수 없다. 그래서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를 십자가의 원수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보았는가? 떡인가! 생명인가! 나에게 있어 삶에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짐승으로 살고 있는가? 사람으로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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