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막살기 삶-이강진 성도님의 글
이 세상에서 막사시는 분은 예수님 뿐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신다. 이것이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이다 (롬 8:3)
이 세상에서 막살지 못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다. 이것이 순종하심이다(빌 2:8). 이제 예수님의 육신의 모양(죄의 모양)은 율법에의해 사망했고, 그 사망으로 죄도 죽었고 죄의 권능인 율법은 무력해져서(고전15:56) 십자가속에 문자로만 남게 되었다. 문자는 십자가를 가리키는 이정표다.
이것이 예수님의 자유하심이다. 그러므로 막 살고 막살지 않음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만 하실 수가 있다.
인간은 죄인이라서 막살고 싶어도 막 살지 못하고 막 살지 않으려해도 막 살게 된다. 막 사는 것과 막 살지 않는 것은 오직 여기로부터 자유하신 예수님만 말씀 하실 수가 있다. 그 판단은 오직 십자가로만 하신다. 즉 성도에게는 삶에 대한 판단이나 규정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 왜냐면 성도로 부르심은 곧 죄인으로 규정 당했다 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막사세요" 라는 말은 죄인인 주제에 "막 살면 안된다" 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함이다. 그것은 언제나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먼저 보라는 말이다. 십자가를 가리키는 이정표로서 말이다.
성도는 예수님의 자유하심 속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자이기에 죄인이지만 의롭다고 여김을 받게 된다. 의의 자유이다. 정죄하는 죄의법에서 벗어난 곳이다. 그래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면서 막산다. 즉 그 뜻은 정죄의 두려움에서 해방이 되었다는 것이다(롬 8:2).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저주 받으심과 죽으심이 먼저 등장하고 나서야 비로소 성도는 발견이 되고, 서로 서로 막사는자들임이 확인 되는 것이다(롬11:32). 다시는 정죄가 없다는 말씀으로 여기 저기 숨겨져 있던 죄들이 막 사는 것으로 툭툭 삐져나온다.
성도에게 막살지 말아라(선을 행하라)하는 율법의 요구는 바로 저주였다. 그 저주를 십자가에서 예수그리스도가 대신 다 받고 계신다. 그렇게 하심으로 선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께만 범죄한 죄인이 된다. 그래서 언제나 상한심령이 된다. 이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죄인으로 사는 것이(막사는 것이) 세상을 대하여 사는 것이 아니다.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하여이다. 어떤이들은 은혜를 풍성히 받기 위하여 더 막살자라고 한다고 비방을 하는데 이 비방은 법 아래서는 성립이 된다. 법은 행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이 언제 막살아라 했느냐 말이다. 막살지 말라고 했지. 세상에서 막사는 것은 용서가 되지 않는다. 즉각 법으로(율법, 양심법) 정죄를 받게 되고 그 끝은 사망이 된다.
예수님에게 법은 문자로써 십자가의 이정표가 되었는데 "막 살지 말아라"를 읽었으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야지 "거룩한 삶을 살기"니, "은혜의 삶이 살아지기"니 하는 논술문을 써내라는 말이 아니다. 논술문은 내가 쓰는 행함의 요점 정리이다.
성도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다. 그렇게 우리를 사용하시고자 부르셨다. 그래서 우리라는 죄인을 날마다 십자가에 죽이시고 날마다 새롭게 살리시어서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헛되지 않으심을 증거물로 남기신다(고전1:17). 성도라는 증거물이다.
이렇게 죄인이라는 재료(죽음, 어두움)에서 주님의 살과 피로 늘 새롭게 자기백성을 만들어 내심으로, 십자가에서 완성된 새언약이 바로 하나님아버지와의 창세전 언약이었고 그리고 오직 예수님만이 주가 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그래서 주의 백성은 늘 범사에 감사함이라는 말씀속에 있다. 이 말씀속을 예수안이라 한다.